매일신문

[명작, why?] 카를 슈미트-로틀루프/여우

사물의 존재성 '이차원의 타블로'로 재구성

표현주의가 정점에 이른 1905년 독일의 드레스덴 실업학교 건축학과에 재학 중이던 카를 슈미트-로틀루프와 프리츠 블레일, 에리히 헤켈,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등 청년 4명이 모여 미술단체를 결성했다. 그 중 '다리파'(브뤼케파, Die Brucke)라는 이름을 지은 카를 슈미트-로틀루프는 자신의 성(姓)에 고향 이름인 로틀루프를 붙일 정도로 조국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그리고 1906년 이 단체 가입을 요청한 에밀 놀데의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 카를 슈미트-로틀루프는 "브뤼케파의 목적 중 하나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모든 혁명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것, 이것이 다리라는 이름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면서 단체의 성격을 규명지었다.

카를 슈미트-로틀루프는 1907년부터 정기적으로 북해 휴양지 당가스트에 체류하며 강렬한 색채와 잘 마무리된 화면구성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다른 브뤼케파 회화와 구별되는 짙고 화려한 원색의 풍경화와 인물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1910년부터는 집중적으로 목판과 석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11년에는 노르웨이에서 여름을 보낸 후 대다수 브뤼케파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던 베를린으로 이주해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도시생활을 묘사하는 데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그는 오토 뮐러와 라이오넬 파이닝거를 만나면서 새로운 미술화풍에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파이닝거로부터 입체파 양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많은 자극을 받았다. 이때부터 초상화를 반추상적이고 입체적인 형태로 그리기 시작했다.

작품 는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큐비즘이 추구했던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하려는 양식에 일치시켜 나가려 했으며,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tableau)로 재구성하려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동부전선의 전투에 참가한 그는 1919년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파견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1919년에 설립된 예술노동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정치와는 담을 쌓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의 그림에서도 정치색을 전혀 느낄 수 없다.

1931년 그는 베를린 미술아카데미의 멤버가 되지만 2년 후 나치주의자로 인해 지위를 박탈당하게 된다. 또한 1937년에는 '퇴폐주의 예술가' 목록에 포함됐고 1941년부터는 그림마저 그릴 수 없었다. 또 불행이 겹쳐져 1944년 그의 수많은 작품이 보관돼 있던 작업실이 폭격으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1946년 다시 미술아카데미에서 강의할 수 있었고, 후에는 베를린의 다리파 미술관을 설립하는 데 참여했다.

김태곤(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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