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 계곡 일대 산세의 대단함은 대강 둘러봐도 금방 실감된다. 영남알프스 쟁쟁한 명산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는 말이 결코 과찬이 아니다. 1750년대 '택리지'(擇里志)가 "병란 피할 복지라 하고 승가에서 성인 천명이 나올 곳이라 한다"고 써 둔 이유를 짐작할 듯하다. 거기다 청도군청은 일대를 1983년 말 자연공원으로 묶고 십수 년째 출입까지 통제하고 있다. 지금 이곳 자연 상태는 이 시대가 유지할 수 있는 최상급이라 봐야 할 터이다.
하지만 신라가 팽창하던 시절, 그 땅은 서라벌의 소비재를 충당해 주는 공장지대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관측이 있다. 엄청난 양의 숯을 구워 조달함으로써 서라벌이 연기 없는 도시가 될 수 있게 해 준 곳이자, 신라군에 무기를 만들어 대던 곳이었으리라는 얘기다. 경주 시가지 인근에는 큰 산이 없어 쇠나 숯이 날 여지가 적은 반면, 당고개를 넘고 산내면을 지나면 바로 닿을 수 있는 이곳은 그 주산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랑이 무대 삼아 훈련하고 생활하던 땅이 이 일대의 험산심곡들이라는 전설도 곳곳에 널려 있다. 세를 확장해 가던 신라가 서쪽의 가야세력과 맞부딪치던 시절 이야기니 개연성 높은 일일 것이다. 이쪽 계곡에 다섯 개의 甲紗(岬寺), 즉 '오갑사'가 창건된 것도 그때였다. 오갑사가 순수 사찰의 경지를 넘어 신라에 매우 중요한 군사거점 같은 곳이었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이유다. 심지어는 그게 화랑의 군사기지 아니었을까 주목하는 시각까지 있다.
그 오갑사의 중심은 운문사였고, 운문사는 '대작갑사'(大鵲岬寺)라 불렸다. 이 절 남쪽(7리) 더 깊은 상류 계곡 속 천문동 자리에 '천문(天門)갑사', 하류인 북쪽(8리) 오진리 입구 자리에 '소보(所寶)갑사', 지룡능선 너머 동쪽(9천보) 삼계계곡에 '가슬(嘉瑟)갑사', 호거능선 너머 서쪽(10리) 대비골(박곡리)에 '대비(大悲)갑사'가 포진해 오갑사가 됐다.
다섯 갑사가 한꺼번에 창건되던 때는 서기 560~566년 사이였다. 북대암 인근서 수행하던 한 스님이 이 일의 주체로 나타나 있으나 그 실제 지휘자가 정권이었을 수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창건과 중창을 군사적 목적과 연관 지어 생각한 결과다.
그러고 보면 오갑사의 창건 시기는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한창 영토 확장전쟁을 벌이던 시기와 일치한다. 착공 2년 뒤인 562년에 대가야를 합병한 게 상징적 사례다. 그 전쟁 때 신라군의 최전방 기지는 어차피 청도였을 터이다. 하필 그때에 맞춰 오갑사가 창건된 걸 우연으로만 보기가 아쉬울 법도 하다.
운문사의 첫 중창주라는 원광법사가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제시해 줬다는 사실에서도 군사적 연관성이 읽힐 소지가 있다. 서기 600년 중국서 돌아온 스님은 대작갑사에 3년 머문 뒤 가슬갑사로 옮겼으며, 거기서 세속오계를 제시한 것으로 돼 있다. 그 가슬갑사 터로 삼계계곡 계살피골 깊은 곳을 지목하는 경우가 있으나, 유물 출토 상황 등으로 미뤄 배너미골 즈음이었으리라 보는 시각 또한 강력하다.
두 번째 중창주 '보양국사'는 아예 고려 왕인 왕건을 군사적으로 돕는다. 신라가 패망한 뒤 불교가 신생 세력과 손을 잡은 모양새다. 반대급부로 왕건은 운문사에 토지 500결을 내려줬다. 유홍준 교수는 그 면적이 청도 전체 논밭 면적의 8분의 1(조선 초 기준)에 해당한다고 계산해 놓고 있다. 운문사는 그로써 경제적으로 반석 위에 올라앉았다고 봐야 할 터이다.
운문사라는 이름도 서기 937년 그 시점에 왕건이 내려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전 해에 후백제까지 소멸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했으니 축하 논공행상이 있었을 법하다. '운문'은 중국 '운문종'의 개조라는 광동성 운문산 문언(864~949)스님에서 이름을 딴 것이라 했다. 하지만 937년은 운문스님 생전인 바, 정보 전파 속도가 매우 느리던 혼란기 후삼국시대 이 땅까지 그 스님의 명성이 자자해졌으리라고는 간단히 납득되지가 않는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그 이후에 얻은 것 아닐까 싶다.
운문사 중창 과정에서 그런 일들 못잖게 주의를 끄는 사안은 '까치'의 등장이다. 후삼국 전쟁으로 파괴돼버린 운문사 중창을 위해 보양스님이 고심하고 있을 때 까치가 쪼는 지점을 팠더니 탑 쌓을 전돌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운문사 이름에 '까지 작'자가 들어가 '작갑사'(鵲岬寺)가 됐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운문사 이름은 그냥 '대갑사' 정도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 중 '갑사'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앞서 본 바 있는 '유운문산록'(이중경) 속에 등장하는 어떤 스님의 설명이 참고가 되려나 싶다. 그 스님은 "까치가 쪼는 지점에서 파낸 전돌을 쌓아 사방 1장(丈) 높이 2장 크기의 갑(岬)을 만들어 그 속에 불상을 모셨다"고 했다. 사방 2m 높이 4m 크기의 탑 비슷한 형태이되, 사리가 아니라 불상을 모셔 불전의 기능을 갖도록 한 일종의 건축양식이 갑이 아닐까 생각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까치와의 인연은 그 후에도 이어져, 조선시대 기록에 까치를 부른다는 뜻의 '환작대'(喚鵲臺)가 절 뜰 복판에 있었다 한다. '작압'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전각도 있으니, "산이 오압(五鴨) 사이에 있다"고 해서 '압(鴨)' 자를 덧붙였다는 설명이 보인다.
이런 여러 정황에서 자연스레 연상되는 게 석남사 기록이다. 석남산(운문산)에 까치가 많아 그 이름이 '까치산'이 됐다가 '가지산'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밝혀낼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까치와 이 땅 사이엔 필연코 두터운 인연이 있지 않을까 싶다.
1229년엔 선종 가지산문 중흥조인 원응국사가 주지로 부임해 운문사의 경제기반을 더 튼튼히 했다. 1277년엔 일연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삼국유사를 썼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절이 타버렸다가 100년 뒤인 1690년대에 설송스님에 의해 재건됐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어 온 운문사에 현대 들어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비구(남자)스님 대신 비구니(여자)스님들이 절을 맡은 일일 터이다. 거기엔 대한불교 조계종의 굴곡 많았던 현대사와 대구·경북지역의 중요한 최근사가 집약돼 있기도 하다.
조계종 불학연구소의 '불교사연구총서'들과 전국비구니회 편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 등의 서술에 따르면, 그 전환 계기는 비구·비구니 스님들이 벌인 절 되찾기 운동이다. 1954년 격화된 그 일을 통해 대처승들로부터 많은 절이 회수됐으며, 그 과정서 대구 동화사가 1955년 '비구니총림'으로 지정됐다. 교구 본사 운영권을 비구니스님들이 넘겨받는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일 년 만에 중단됐다. 동화사는 다시 비구스님들에게 넘겨지고 비구니스님들에겐 대신 운문사가 주어졌다.
운문사 또한 그 전에는 대처승들이 운영하며 강원(講院)과 선원(禪院)을 열고 있었다. 그 시절만 해도 비구니(혹은 사미니)스님만을 위한 강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경전을 가르치는 강원과 참선하는 선원은 스님 육성과 수행의 필수 기관인데도 기회가 많지 않았다. 비구니스님들은 운문사 산내 암자인 청신암(靑◆庵)에 기거하면서 큰절 혹은 다른 강원으로 가 경전을 공부했다.
대처승들로부터 넘겨받아 운문사를 재건한 초기 비구니 주지도 바로 그 청신암 출신인 유수인(兪守仁·1898~1997)스님이었다. 스님은 운문사 바로 앞마을인 운문면 신원리 및 그것과 심원령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경주 산내 일부리 심천마을에 부모 및 본인의 출생 연고를 갖고 있었다. 1905년 여덟 살 때 청신암 스님을 따라 절에 들어선 후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하고 금강산 등 전국을 돌며 만공(滿空)스님 등 여러 선사들 아래서 참선 수행했다.
그러다 1940년 이후 부산에 머물며 '서운암' 등을 창건해 포교활동에 나서 있던 중 운문사 주지로 임명된 것이다. 수인스님은 그 후 1966년 말까지 운문사를 맡아 대처승들과의 힘든 송사(訟事)를 이겨내느라 법정에 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농지개혁으로 잃어버린 경제적 기반을 회복시키고 전쟁까지 겹쳐 더 피폐해진 전각 재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렇게 힘든 중에도 비구니스님들은 1958년 비구니 전문 강원을 개원했다. 지금까지 1천600여명의 스님을 배출해 전국 4대 비구니승가대학 중에서도 최다 실적을 쌓고 있는 운문사 강원이 출범한 것이다. 대강백들이 이 강원을 이끌어 큰 힘이 돼 줬다.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장 묘엄스님도 1960년대 후반 운문사 강주를 지냈다. 1970년대부터는 명성스님이 맡아 더 발전시키고 2003년에 선원(문수선원), 2008년에 율원(律院·보현율원)까지 갖췄다. 불교 종합대학 격인 '총림'(叢林) 규모에 이른 셈이다.
1994년 이후 조계종에 새 규정이 생겨 승가대학을 졸업해야 스님이 될 수 있게 됐다. 장래 전국 비구니스님 중 상당수가 자연스레 운문사 출신일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전국 4대 비구니승가대학 중 2개가 경북에 있다는 점도 주목할 일이다. 다른 한 곳은 김천 수도산 청암사이며, 이 외엔 동학사·봉녕사에 승가대학이 있다. 그와 별도로 통학하는 삼선승가대학이 운영되고 있고, 근래 유마사 승가대학이 추가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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