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물통 채우기

학창시절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참 끈질기게도 되풀이되던 악몽들. 그토록 넘쳐나던 시간들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고, 단 하루만 혹은 한 시간만 더 허락되었으면 하던 막바지의 숱한 몸부림들. 시험지가 나누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 단 몇 분의 시간에도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시간들을 말이다. 그 순간 기적같이 시험이 연기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에 환호작약하던 순간은 짧고, 며칠 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또다시 판박이로 되풀이되던 길고도 긴 악몽의 시간들까지. 언제나처럼 뉘우침은 짧고도 덧없으며, 어리석음은 완강하게 되풀이될 뿐이다.

영화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 2007)는 죽음을 앞둔 두 노인이 병원을 탈출하여 모험여행길에 나서면서 겪게 되는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담아낸 영화다. 현대판 '왕자와 거지'의 주인공처럼 전혀 상반된 환경에서 졸지에 같은 운명에 맞닥뜨린 억만장자와 자동차 수리공의 이야기를, 맞춤하여 실제로 동갑내기이기도 한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삭발투혼까지 감행하면서 펼치는 한바탕 엎치락뒤치락 마당놀이인 셈이다. "니콜슨과 프리먼조차도 이 가망 없이 멍청한 영화에 충분한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했다"라는 혹평을 들었다지만, 언제나 괴팍스러운 카리스마를 거침없이 뿜어내는 잭 니콜슨과 어디서나 푸근한 믿음을 은은하게 풍기는 모건 프리먼의 기묘한 동거만으로도 여전히 흥미를 자아낸다.

삶이라는 물통(bucket)을 걷어차 버리기 전에, 즉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혹은 싶었던 일들의 목록을 함께 적어간다. 마주보며 시시덕거리다가, 때로는 티격태격하면서. 불현듯 고대 이집트인들이 천상에 들어설 때, 이승에서의 삶을 평가받았다는 두 가지 질문들을 서로 주고받기도 한다. "당신은 인생에서 스스로의 기쁨을 찾았는가?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애당초 다른 이의 기분 따위에 아랑곳없이 스스로의 기쁨만을 쫓아온 끝의 허망함과 가족들의 평안을 위해 버텨오느라 스스로의 기쁨조차 잊어버렸다는 씁쓸함이 엇갈리고 부딪친다. 이윽고 그것들이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따로따로가 아닌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참으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뻔한 답이지만, 그만큼이나 여전히 막막하고도 만만찮은 숙제이다.

사랑의 물통 채우기 행사가 줄줄이 늘어선 가정의 달, 5월이 지나가고 있다. 지난날 서로가 무심했음에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설혹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더라도 충분히 축복받는 날들이다. 그러나 사랑의 물통이 허겁지겁 벼락치기로, 저 혼자 막무가내로 퍼붓는다고 제대로 채워질 리야. 담겨진 물이 많고 적든 간에, 도리어 함께 어울려 담아가는 과정에 참다운 기쁨이 이미 깃들어 있었음에, 너무 늦지 않게 눈뜰 수만 있다면.

송광익<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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