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봄이 왔나 했더니 벌써 한낮의 햇살은 눈이 부시다 못해 따갑게 느껴진다. 한낮 기온이 초여름의 달궈진 태양을 피하고 가리게 만들 정도다. 봄을 제대로 즐기고 보낼 틈도 없이 성급한 여름이 저만치 다가와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5월 18일은 독일 낭만주의 후기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7.7~1911.5.18)가 50이라는 길지 않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친 날이다.
독일 후기 낭만주의에서 10개의 교향곡(완성작 9개와 미완성 10번을 포함)을 남긴 말러는 한국 클래식 애호가들이 매우 좋아하는 교향곡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말러 특유의 크고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솔로와 합창이 섞여 있는 성악과의 만남은 그의 교향곡을 듣는 사람들에게 거대한 음향과 음악 에너지 앞에 굴복시키는 마법을 지닌 것 같다.
전(全)악장 연주에 90분이 넘게 걸리는 3번 교향곡, 성악가를 포함해 약 1천명의 연주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붙여진 8번 '천인 교향곡', 이외에도 베토벤-슈베르트, 브루크너로 이어지는 9번 교향곡이 마지막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붙여진 9번째 교향곡 '대지의 노래'와 같은 말러의 교향곡들은 오늘날 관현악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감상 레퍼토리가 돼 있다.
1860년 보헤미아의 칼리슈트 지방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말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정식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15세부터는 비엔나 음악원에서 본격적으로 피아노, 작곡, 화성을 배우기 시작했고 1878년 빈 대학에서 당시 유명한 작곡가였던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에게 직접 음악수업을 듣기도 했다.
말러는 생전에 작곡가로서보다는 오페라 극장 지휘자로서 더욱 명성을 날렸다. 1880년 스무살부터 시작된 지휘자로서의 삶을 말러는 평생 유지한 것이다. 1891년 함부르크 극장과의 장기계약은 지휘자로서의 성공을 의미하는데, 이때부터 그는 1년 중 오페라 시즌 열달 동안에는 연주와 연습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짧은 여름휴가 두달 동안 작곡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렇게 남겨진 작품이 10개의 교향곡과 수많은 가곡들이라는 사실이 말러의 심장병뿐만 아니라 만성피로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1897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음악가의 자리인 비엔나 오페라극장 상임지휘자직을 제안받았을 때 말러는 과감히 자신의 혈통인 유태교를 버리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만큼 음악은 오직 하나뿐인 사랑이었다.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1879~1964)와의 결혼은 말러를 그리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대신 사랑하는 두 딸을 주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적 행복은 말러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이 어린 딸의 죽음과 자신의 지병인 심장병이 잇따라 찾아오면서 말러의 음악은 두드러지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암시로 채워지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또 낭만주의 음악 특유의 우수와 비극으로 여겨지면서 말러만의 상징처럼 돼 버렸다.
지휘자로서의 성공은 말러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었지만 늘 인간적인 애정과 따뜻함이 채워지지 못한 말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3중으로 고향이 없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아인으로, 독일인 중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세계 안에서는 유태인으로. 어디서나 이방인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최영애 영남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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