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國恥百年] (22)문화재 수난

경북대야외박물관 보물 부도는 '오쿠라 컬렉션'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 남쪽에 위치한 두 점의 부도는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 부도는 일제 당시 한 일본인 재력가의 집 정원 장식용으로 쓰이는 아픔을 겪었다.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 남쪽에 위치한 두 점의 부도는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 부도는 일제 당시 한 일본인 재력가의 집 정원 장식용으로 쓰이는 아픔을 겪었다.

'월파원'이라 불리는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는 200여 점의 크고 작은 석조물 문화재들이 전시돼 있다. 그 가운데 남쪽 한 켠에 약간 떨어져 나란히 자리한 서로 닮은 모양의 부도 두 점이 눈에 들어온다. 얼핏 보아도 상당히 세련된 작품임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두 점 모두 보물(135호와 258호)로 지정돼 있다.

부도(浮屠)란 승려들의 사리를 안치한 무덤이다. 그래서 원래는 부도와 함께 옆에는 피장자의 생애를 기술한 부도비(碑)가 당연히 세워져 있었을 터. 하지만 어떤 연유로 잃어버려 안타깝게도 그 주인공을 알 수 없다. 이런 형태의 부도는 대체로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선종이 한창 유행했을 때 기려야 할 유력한 승려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시기의 것으로만 짐작할 따름이다.

이 부도가 1950년대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기까지는 대구시 소유였고, 그 이전 일제강점기에는 대구에 거주하던 상당한 재력가로 남선전기 사장이었던 오쿠라 다케노스께란 사람의 집 정원에 장식용으로 쓰인 것이었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그대로 두고 간 탓에 대구시가 접수했다가 관리상의 필요에 의해 경북대로 이관했다. 옮겨다니느라 불행하게도 부도의 원 위치가 대구의 인근 어느 사찰로 추정될 뿐 구체적인 곳은 알 수 없다.

오쿠라는 일본으로 운반하기 곤란해 부도를 두고 간 것이지만 그는 엄청나게 많은 문화재를 일본으로 반출했다. 그가 반출한 문화재는 이른바 '오쿠라 컬렉션'으로 이름지어졌고 그 수량도 굉장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뛰어난 것들이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뒷날 그 가운데 일부는 일본의 동경박물관에 기증되고 1982년 목록이 출판되면서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거기에 실린 것만 해도 천여 점에 달하는 빼어난 것들이었다. 또한 그 일부는 일본의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된 것까지 있다.

오쿠라는 엄청난 재력을 동원, 문화재를 무차별적으로 끌어 모았다. 자신이 살고 있던 대구나 인근의 경주를 거점으로 해 전국을 무대로 삼았다. 대구에 살고 있던 또 다른 골동품 수집가 이치다 지로가 1930년 전남 광양 옥룡면 중흥산성의 폐사지(廢寺址)에 있던 쌍사자석등(국보 103호)을 비밀리에 자신의 집으로 옮기려 했으나 발각돼 실패했지만 오쿠라는 한번도 실수 없이 언제나 목표로 삼은 문화재를 손에 넣었다. 그 수법이 교묘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권도 마음대로 동원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무차별적인 문화재 약탈로 인해 원래의 소재지가 확인되지 않아 학술적인 가치가 없거나 반감된 경우가 적지 않다. 어쩌면 일본으로 밀반출된 문화재 대부분이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밀반출자들은 골동품 수집가라 했지만 그들이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거나 학술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방편이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그들이 침탈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식민지 조선 문화재 전부였다.

한반도가 식민지화되면서 당한 문화재 수난사는 1876년 개항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상인들이 개항장 주변에 상륙해 점차 그 활동 범위를 넓혀가자 그 속에 도굴꾼도 뒤섞여 들어왔다. 당시 그들이 처음 도굴 대상으로 삼은 것은 고려청자였다. 일본인들이 고려청자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자국에서 활동하던 서양인의 안목을 통해서였다. 서양인들은 은은한 비취색을 띤 고려청자를 세계의 도자기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호사가들도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을 보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가격은 엄청나게 치솟았다. 그리하여 일확천금을 노린 도굴꾼들이 조직적으로 조선으로 몰려들기 시작, 고려 왕도였던 개성과 강화도를 중심으로 무덤을 무참하게 공격했다. 이후 그 대상 범위를 전국으로까지 넓혀 도굴을 단행했고 현지인들도 그들에 회유당해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토착 도굴꾼 수도 크게 늘어났다. 일제 침략이 남긴 악폐의 한 단면이라 하겠다.

현지 도굴꾼에 의해 싼 가격으로 공급된 도굴품은 일본 상인을 거치면서 수백, 수천배로 그 가치가 뛰었다. 원래 조선에서는 관습상 분묘 훼손을 가장 죄악시하였으므로 분묘는 잘 보존된 상태였다. 이로 인해 뒷날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도굴이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렀음을 그들 스스로가 인정했다. 자금을 지원해 도굴을 조장한 것은 오쿠라와 같은 수집가들이었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통감부 시절 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를 비롯한 한국에 와 있던 고위 인사들도 너도나도 본국에 보낼 선물용으로 고려청자에 관심을 가졌으니 고려 분묘가 온전하게 남은 것이 극히 드물 정도였다. 1910년 식민지배를 시작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적보존법을 제정한 것도 이런 사정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고려청자로 시작한 도굴과 같은 불법적인 방식은 모든 문화재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혔지만 합법을 가장한 형태의 훼손이나 반출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02년 동경제국대 공대 조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세키노 다다시는 제국 정부의 지시를 받은 공과대학장의 '가능한 한 넓게 관찰하라, 깊지 않아도 상관없다'라는 명령에 따라 62일간 신라의 수도 경주를 비롯해 개성, 한성 등지의 궁전 성곽, 사원 능묘 등 고건축물과 그에 부속된 불상, 조각, 공예품을 문어발식으로 조사했다. 그 성과물은 2년 뒤인 1904년 '한국건축조사보고'로 출간됐는데 이는 이후 문화재 조사의 출발 기준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한편으론 도굴 정보로 유용하게 쓰이는 꼴이었다. 세키노의 조사는 겉으로는 학술적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으나 일제의 한국 식민 침략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 찾기 예비작업이었다.

이후 낙랑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북선경영설과 함께 낙동강 유역에서 남선경영설(임나일본부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보물찾기식의 발굴(수십미터의 고분을 수일만에 발굴한 것으로 미뤄 오늘의 수준에서 보면 사실상 도굴이었다)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는 발굴 그 자체가 문화재 파괴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도굴할 대상 전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굴을 통해 파헤쳐진 것을 대상으로 다시 발굴을 함으로써 전국의 문화재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어 제대로 성한 것 하나 없을 정도였다. 그 참상의 심각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학술로 포장한 발굴과 무자비한 도굴이 상부상조하는 우스꽝스런 일이 빚어졌던 것이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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