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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의 시와 함께(44)]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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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 박정남

#엄원태의 시와 함께 44.

뼈 하나 없는 벌레들이 과일의 살을 뚫고 들어와 누워 있다

억센 이빨 하나 없는 입술이 오물오물 껍질을 찢어

구멍을 내어 온몸을 들이밀어 들어와 살고 있다

나뭇잎에 구멍을 뚫는 벌레 한 마리의 힘으로

저 달도 쉽게 구멍이 뚫릴 것이다

뚫린 구멍을 가진 몸들이 가벼워져 둥둥 하늘로 떠오른다

자신을 파먹는 벌레를 밀치지 않고 받아들인

잔뜩 발기되어 있는 달의 질이 붉다

무기도 하나 없이 파 들어가는 벌레들의 힘을 보아라

무기도 하나 없는 그 힘없는 벌레들을 받아들여

넉넉히 먹여 살려 온 밤하늘의 넉넉한 달빛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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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시인 특유의 '숯검정이' 여성성은 생명의 근원적 에너지이자 모성(母性)으로 발현되곤 한다. 그 모성은 회임과 출산이라는 성(性)과 고통/상처의 환상적 이미지 결합의 시적 변용을 통해, 비록 축축하고 어둡지만 보다 깊고 그윽해진 새로운 생명의 경지(境地)를 보여주곤 한다.

'달'은 그런 시인의 시학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살'과 '몸', '입술'과 '구멍'의 에로티즘은 "저 달"에까지 비약적으로 확장되고, 그 환상적 에너지를 타고 "뚫린 구멍을 가진 몸들이" 비로소 "가벼워져 둥둥 하늘로 떠올"라 달이 된다. "무기도 하나 없이 파 들어가는 벌레들의 힘"은 고통이자 상처일 테지만 역설적으로 사랑의 힘이며, 그 고통/상처마저 "밀치지 않고 받아들이"고 포용할 줄 아는 게 박정남식 여성성/모성성이다. 그것은 마침내 "그 힘없는 벌레들을 받아들여/ 넉넉히 먹여 살려 온 밤하늘의 넉넉한 달빛"으로 비추게 하는 충만한 생명/우주 에너지를 보여주기에 이른다. 시인은 이 시로 올해 을 수상한다. 축하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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