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이메일 강박증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는 천천히 부쳐 주는 우체국이 있다고 한다. 보내는 사람이 원하는 시기에 맞춰 몇십 년 뒤에라도 보내준다니 '굼벵이 우체국'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 우체국에서 다루는 우편물 중에는 몇 년 뒤의 자신에게 보내는 타임캡슐 형태의 편지, 가족에게 보내는 유언장 등 현재보다 미래를 담은 게 많다. 빛의 속도로 빨라진 첨단 통신 수단으로는 오히려 배달이 어려운 편지다.

청마 유치환은 흠모하는 여류 시인 이영도에게 20여 년 동안 5천 통이 넘는 연서를 썼다.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라는 절창 '그리움'을 낳았다. 하루건너 한 번 꼴로 쓰고 봉투에 담아 우체통에 넣은 뒤 답장을 기다리는 설렘과 아픔은 '0과 1'로 조합된 디지털 통신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다.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이런 편지는 언감생심이다. 손으로 직접 쓴 편지는 1년 가야 한 통도 받기 힘든 요즘이다. 우정사업본부 통계를 보면 국내 일반 통상 우편물은 2002년 52억 2천여만 통에서 지난해 43억 6천여만 통으로 7년 사이 15% 이상 줄었다. 그 대신 수백 수천 배 늘어난 게 이메일이다.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뒤통수를 칠 때가 많다는 걸 절감하게 해 주는 사례가 이메일이다.

미국의 한 소프트웨어 업체가 미국인과 영국인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근무 시간 외에도 이메일을 확인하는 사람이 70%나 되고, 50% 이상이 휴가 중에도 이메일을 확인한다. 심지어 30% 안팎이 병가 중에도 이메일은 아침저녁 꼭 확인한다고 하니 가히 강박증이라 부를 만하다. 이런 강박증이 자신의 일을 너무 사랑한다거나 기다리는 내용이 있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정리해고가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해고된 동료의 일까지 감당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이메일 확인이 됐기 때문이다.

오늘밤엔 하얀 종이를 꺼내 가슴속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손으로 써 보자. 고치기 힘들어 답답하다면 PC로 출력해 봉투에라도 담아 보내자. 그마저 어렵다면 이메일을 프린트해 우편으로 보내주는 우정사업본부의 'e그린우편' 서비스라도 이용하자. 마음을 전하는 데 이메일은 너무 삭막하다.

김재경 특집팀장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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