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추파(廣平秋波).
10리길 평원에 억새밭이 융단처럼 펼쳐졌다. 구름보다도 하얀 억새가 한줌 바람에 하늘거린다. 광활한 평원 위에 일렁이는 가을 물결, 여린 꽃술로 피어오른 억새가 막 가을 하늘을 밀어올리기 시작한다. 이 한 컷으로도 가을을 다 집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렁이는 억새들의 몸짓에 이끌려 커피를 꺼내든다. 은빛 군무에 커피향이 얹혀 순식간에 '추억'(秋憶)속으로 빠져든다.
자연물로서 억새는 흔들리는 속성 상 '지조 없는 여자' 의미밖에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평원에 은빛 물결로 펼쳐지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낸다.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다'는 억새. 강원도 민둥산, 장흥 천관산, 밀양 재약산의 억새는 이미 명품 반열에 올라있다. 개화시기도 전국적으로 큰 차가 없어 동시다발적 국민축제로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간월재의 장쾌한 조망에 빠져들다
억새 축제를 알리는 소식이 일간지 지면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가을 마중을 위해 급히 안내산행에 자리를 예약했다. 관광객들을 가득 실은 버스들이 배내고개를 힘들게 오르더니 힘에 겨운 듯 산꾼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원색의 등산복 물결이 고개를 가득 채웠다.
오늘 코스는 배내고개-간월산-신불산-청수좌골-배내산장 코스로 잡았다. 들머리를 배내고개로 잡아 한걸음에 오른다. 30분 쯤 오르니 배내봉(966m)이 일행을 맞는다. 간월-신불 능선은 투입 대비 산출이 명쾌한 산이다. 한두 시간이면 바로 1,000m급 봉우리에 오르면서 영남알프스의 비경에 바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의 햇살에 이파리들이 제법 가을빛을 띠었다. 등억리 온천 지구를 굽어보면서 한 시간쯤 올랐을까 간월산 정상이 눈앞을 막아선다. 울주를 내려다보며 1,083m 봉우리를 자랑하는 간월산, 기슭에 온천을 끼고 있어 지역민에게 좋은 휴식처를 제공한다.
정상 왼쪽으론 간월산 공룡능선이 날카롭게 펼쳐져있다. 벌써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한 능선은 멀리서 보기에 마치 물고기 등지느러미처럼 날카롭고 뾰족하다. 베일 듯 위태로워 보이는 저런 곳에도 발길이 미칠까 싶은데 아뿔싸 그곳에도 등산객들이 보인다.
공룡을 비켜서자마자 시원한 간월능선이 우리를 맞는다. 능선의 굴곡을 따라 억새들이 손짓을 한다. 30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눈앞이 '펑'트이더니 장쾌한 간월재의 능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거대한 U자 협곡에 억새들이 은빛 물결로 굽이친다.
넓게 펼쳐진 평원 사이로 억새들이 낮게 몸을 숙였다. 고산(高山)의 억새는 모두 키가 낮다. 정상부 계곡과 능선에는 대기의 이동이 항상 긴박하기 때문이다. 안개가 심할 땐 큰 능선 하나쯤은 1, 2분 사이에 감춰버리기 일쑤다. 그런 기류(氣流)와 바람 속에서 모든 식물들은 필요 이상의 생장을 스스로 억제한다. 자연에서도 겸손의 미덕은 유효하다. 억새들은 자신을 낮출 줄 알았기에 종족을 번식하고 인류에게 봉사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가을이 넘실, 신불평원의 억새물결
간월재와 신불산은 고개를 사이로 맞닿아 있다. 신불, 간월산행의 포인트 중 하나는 간월재의 시원한 평원이다. 조망의 즐거움은 유료(?)다. 등산객들은 간월재 눈 맛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신불산으로 향하는 급경사 길을 올라야하기 때문이다.
신불산 정상엔 등산객들을 위한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이 시설들 덕에 억새들은 등산객들의 거친 발에서 안전할 수 있다.
등산객들이 데크에서 다과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인파속을 헤치고 나와 왼쪽으로 신불공룡에 잠시 시선이 머문다. 기묘한 암릉들이 구름 속에 가끔씩 자태를 드러낸다. 암벽등산가들은 신불, 간월공룡 곳곳의 릿지(Ridge)를 찾아 암벽타기 스릴을 즐긴다. 신불공룡에서 시선을 거두어 멀리 영축산(취서산)을 바라본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신불평원이 수채화처럼 하얗게 펼쳐져 있다.
#행복한 가을 동행, 청수골로 하산 길
신불재와 영축산사이의 330만㎡(100만 평)의 억새 군락지는 재약산의 사자평, 양산 천성산 화엄벌과 더불어 영남알프스의 억새능선을 대표한다. 주변의 산들이 서로 어울려 명성을 공유하고 스스로 가치를 키우는 것이 이 또한 억새의 군집미학과 닮았다.
하산길은 영축산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청수좌골로 잡았다. 영축산과 신불산의 중간쯤에 위치한 분지다. 분지 특성상 사방이 막혀 계곡을 돌아 나온 바람들도 그곳에선 숨을 죽인다. 바람이 없는 분지, 그 틈에서 타 억새들은 맘껏 키를 높였다. 정강이 높이의 억새에 익숙해있던 등산객들은 터널을 이루는 억새에 놀란다.
실바람이라도 스치면 밑둥부터 흰 머리까지 서로 몸을 붙잡고 기류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서걱서걱 울음소리 따라 가을이 깊어간다.
하산길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청수좌골로 내려가는 분지에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어깨높이로 자란 억새가 적당히 햇빛을 가려준다. 손등이며 얼굴을 간지르는 억새와의 스킨십도 짜릿하다. 애써 낭만을 찾지 않아도 낭만은 곁에 있다. 분위기에 젖어든 연인들의 보폭도 점점 느슨해진다. 군데군데서 억새를 카펫 삼아 식사를 하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정겹다. '가을 테라스'에서의 오찬, 그들이 스푼으로 실어 나른 건 한 점 가을, 한 모금 추억이 아닐까.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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