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끈이 느슨해짐을 느낄 때마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에 간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것은 특별히 소중한 인연도 있지만 몇 가지 다른 이유가 있다. 사찰 경내에서는 휴대폰이 안 된다. 현대인들의 필수품인 휴대폰이 편리함도 주지만 정숙해야 할 청정 도량에서 마구 울어댈 때는 여러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데 그런 일이 없다. 적막한 시공이 함께 넘실대는 새벽 3시 예불은 웅장함과 환희로 고압 전류에 감전된 듯 온몸을 전율케 한다. 풍경소리 살아 숨쉬는 송광사에서 30분 정도 불일암으로 오르는 길에 굵은 대나무숲과 삼나무숲이 장관이다. 빽빽이 도열해 있는 삼나무와 대나무 사이로 난 작은 길, 바람이 건너 다니는 길이다. 말없는 그 길이 티끌 같은 세상, 훌쩍 뛰어넘으라며 지친 마음을 솔솔 빗질해준다.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사형이 집행되자 큰 충격과 자책을 느껴 본래의 수행승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며 청빈과 무소유를 실천했던 법정 스님의 발자취가 살아 꿈틀거리는 듯 불어오는 바람조차도 편안하게 느껴진다. 십여 년 전쯤 법정의 상좌 D스님에게 들은 다담은 마음 지칠 때마다 꺼내 먹는 청량제 같다. 무소유를 실천하신 법정 스님은 친지가 주례를 부탁하면 "유감스럽지만 내게는 주례 면허증이 없어 해줄 수 없다"며 사양했는데 딱 한번 주례를 선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주례사의 요지는 이렇다. '나는 오늘 일찍이 안하던 짓을 하게 됐다. 20년 전에 지나가는 말로 대꾸한 말빚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오늘 짝을 이루는 두 사람도 자신들이 한 말에 책임져야 한다. 청첩장에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세상에 서겠다고 했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이 자리에서 숙제를 내주겠다. 숙제 하나, 한 달에 산문집 2권과 시집 한 권을 밖에서 빌리지 않고 사서 읽는다. 사는 일이 곧 시가 되어야 한다. 쌓인 책들은 자식들에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의 자취로, 정신의 유산으로 물려주라.
숙제 둘,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예 집안에 들여놓지 말라'는 칼날 같은 내용이었다.
이 말씀을 다시금 생각하면서 과연 나는 가족이나, 친구,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말빚을 지고 있는지, 사는 일이 곧 시가 되고 있는지, 새삼 뒤돌아본다.
법정의 삶을 이룬 세 가지 행복, 말벗이 되어준 책 몇 권과 채소밭, 개울물 길어 마시는 차 한 잔을 그리며 내가 내 안에 갇혀 있을 때마다 언제라도 찾아가 얼굴 묻을 수 있는 곳, 손수 만드신 나무의자에 앉은 소복한 햇살과 개울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따뜻하게 다가온다.
서 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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