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여성 ROTC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사실상 결정지은 것은 원자폭탄이 아니다. 1945년 3월부터 8월까지 도쿄를 포함한 66개 대도시를 네이팜탄으로 불태워 버린 미 공군의 전략 폭격이었다. 당시 스즈키 간타로(鈴木 貫太郞) 총리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장기간의 공습으로 일본이 거의 파괴되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B-29 폭격만으로도 나는 일본이 항복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 폭격을 지휘한 이가 '무쇠 엉덩이'란 별명의 저돌적 지휘관 커티스 러메이였다. 오하이오 콜럼버스에서 가난한 집안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이렇게 군에서 입신(立身)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군사관(ROTC) 제도 때문이었다. 대학에는 들어갔지만 학비가 없었던 그는 ROTC에 지원했다. 학비 일부가 지원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고도 항상 쪼들렸던 그는 돈을 벌기 위해 학과 교육과 ROTC 교육을 마친 후 오후에 주물공장으로 달려가 새벽 2, 3시까지 일했다. 이런 고학(苦學) 생활로는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수업 시간 내내 졸았고 결국 토목공학 학위를 따지 못했다. 하지만 ROTC가 만들어준 기회는 그를 훗날 공군참모총장에 올려놓았다.

ROTC는 미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독립 직후인 1819년 버몬트주의 한 대학에 군사학이 정규 교과목으로 설치된 것이 그 첫걸음이다. 이후 1916년 윌슨 대통령 때 정식으로 ROTC 제도가 출범했고 1948년에는 정규 현역 장교 양성 제도로 발전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연간 8천 명의 ROTC 장교가 배출되고 있으며 이들은 미군 장교의 70%를 차지할 만큼 미군 장교의 근간이 되고 있다. 요지부동의 금녀(禁女)의 벽이었으나 1973년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이후 미국 최초의 여성 장군 안나 헤이즈, 최초의 여성 우주선 선장 아일린 콜린스 대령 등 훌륭한 여성 군인을 많이 배출했다.

건군 이후 처음 실시되는 여성 ROTC 모집에 60명 정원의 6배인 360명이 몰려 6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고 한다. 미래 세계에서 실제 전쟁이든 경제 전쟁이든 여성의 활약 여부가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 여성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경쟁력으로 무장한 여성들이 군에 들어온다는 것은 우리 군의 미래가 그만큼 밝아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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