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월 남편과 함께 F1 경기 결승전을 관람하고 왔다. 중앙 분리대도 없는 88고속도로를 한밤에 달려갔다. 길이 좁아 마주 달려오는 차들이 어둠을 쫓기 위해 내뿜는 빛을 피할 길이 없었다. 사실 우리는 결승전을 관람한다는 설렘도 별로 없이 영암으로 향했다. 남편은 경기장의 완성도를 확인하기 위한 업무적 방문이었고 나는 동행에 대한 강요로 마지못해 나선 길이었다.
광주의 숙소에서 전남 영암의 F1 경기장으로 가는 동안 계속 비가 쏟아졌다. 경기장을 2㎞쯤 남겨둔 거리에서 도로는 아예 주차장으로 변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2㎞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래, 걷자. 나는 수많은 차량들, 사람들의 무리를 보며 예기치 못한 기대가 솟아남을 느꼈다. 앞으로 다시 경험해 보지 못할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듯한 설레는 기분마저 들었다.
포장되지 않은 진입로는 질척이다 못해 웅덩이 수준으로 물이 고여 있었다. 짧은 공사 기간으로 인해 회사에서 마치 부실공사를 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고 남편은 내심 불편해했다. 진 땅을 철벅철벅 밟고 가는 동안 자연의 느낌이 발바닥을 타고 들어왔다.
자리를 찾아 앉았다. 주변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떠들고, 난 귀마개를 끼웠다 뺐다를 반복했다. 그 모든 소란스러움은 경기가 시작되자 완전히 사라졌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경기는 자주 중단되었지만 선수들은 처음 경험해 보는 트랙에 익숙해지기 위해 달려보고 멈춰 섰다. 굉음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던 차가 커브 길에 이르면 앞차와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절로 비명이 나왔다. 그러나 선수들은 어디쯤에서 어느만큼 속도를 줄여야 앞차와 추돌하지 않는지 알았다.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다가도 매끄럽게 커브길을 돌았다. 정확한 판단! 속도를 지각하고, 판단하고, 판단에 뒤이은 재빠른 행동, 이 모든 것은 인간 인지의 핵심이다.
인간이 이루어낸 현대 과학의 눈부신 발달은 저리 당돌한 기계들을 만들었다.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컴퓨터 메타포로 설명한 인지과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컴퓨터도 인간이 매일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해내는 이런 인지 과정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나는 귀마개를 빼고 차량의 질주 속도와 거기서 생겨나는 소리를 마음껏 들이켰다. 누가 챔피언이 되느냐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새빨간 페라리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달렸지만 그것보다 더 나를 흥분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사람들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나 역시 집단적 흥분에 중독되길 원했다.
김지애<인지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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