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 경북을 걷다] <46> 영덕 축산에서 괴시마을까지

빽빽한 해송 사이로 동해 푸른 물결…보석같은 블루로드

손만식 작-축산항 대소산 봉수대에 올라서면 동서남북 사방이 탁 트인 절경을 만날 수 있다. 맑은 날이면 저 아래 바닷가 물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축산항에서 바다 쪽으로 홀로 선 섬처럼 생긴 산이 죽도산이다. 전망대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손만식 화백은
손만식 작-축산항 대소산 봉수대에 올라서면 동서남북 사방이 탁 트인 절경을 만날 수 있다. 맑은 날이면 저 아래 바닷가 물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축산항에서 바다 쪽으로 홀로 선 섬처럼 생긴 산이 죽도산이다. 전망대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손만식 화백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풍경에 깜짝 놀랐다"며 "봉수대 정상에 서 있으니 잡다한 세상 고민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번 블루로드 코스 중에 가장 힘든 구간이 봉수대 정상에 오르는 길이다. 나머지는 오르내리기를 반복하지만 그다지 힘들지 않다.

대게로 유명한 축산항에서 길을 시작한다. 울진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영덕읍을 지나 축산면 쪽으로 빠지는 이정표를 보고 길을 찾으면 쉽다. 축산항에서 북쪽으로 사진리가 있는데, 두 지역을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일품이다. 해안도로 감상은 잠시 뒤로 미뤄두자. 축산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왼편 길가에 '영덕 블루로드'를 알리는 나무기둥을 찾아야 한다. 오늘 길의 출발점이다.

전체 50여㎞에 이르는 영덕 블루로드 중에서 오늘 동행 길은 'C코스'에 해당한다. 축산에서 괴시리와 대진해수욕장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17.5㎞가 C코스. 지난 4월 동행길이 경정리 대게원조마을을 중심으로 한 바닷길이었다면 오늘 길은 오롯이 산과 만나는 길이다. C코스 중에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구간이고, 나머지는 다시 대진과 고래불해수욕장이 있는 바닷길이다.

대소산(봉화산·278m)로 오르는 길이 갈지자로 이어진다. 해발고도는 높지 않지만 바로 바닷가에 붙어있다보니 적잖은 거리를 올라야 한다. 크게 가파를 것도 없지만 정상에 있는 봉수대까지 내내 오르막이 이어지다보니 제법 숨이 가쁘다. 이 길은 그저 흔한 등산로가 아니다. 신작로가 닦이고 해안도로가 자리잡기 전, 이 길은 축산과 영해를 잇는 오솔길이었다. 산을 피해 멀리 둘러가는 대신 비록 오르기 힘겹지만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이 길을 택했다. 장날이면 사람들은 온갖 물건을 이고 지고 봉화산을 오르내렸으리라.

이마에 질끈 동여맨 손수건이 눅눅해질 무렵 정상에 닿았다. 저 멀리 방송국 송신탑이 거대한 철골구조물처럼 우뚝 서 있다. 아무리 필요성에 공감하며 좋게 보려고 해도 풍광을 망치는 쇳덩이를 대할 때면 절로 혀를 차게 된다. 일부러 시선을 돌려 봉수대로 올랐다. '대소산 봉수대'는 조선 초기에 세워졌다. 남쪽으로 별반봉수대, 북쪽으로 평해 후리산 봉수대, 서쪽으로 광산봉수대를 거쳐 진보에 있는 남각산 봉수대로 이어지게 돼 있다. 봉수대 돌벽 안에 흙을 가득 채워놓아 마치 거대한 봉분처럼 보인다. 그 곳에 올라서면 남으로 축산과 북으로 영해가 한눈에 들어찬다. 옅은 안개가 낀 탓에 서쪽으로 병풍처럼 늘어선 낙동정맥이 가뭇거린다. 길안내를 맡은 영덕군 관광개발담당 강영화 씨는 "날이 맑으면 영양에서 청송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과 주왕산까지 훤히 보인다"고 설명했다.

봉수대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얕은 산봉우리가 물결처럼 굽이치는 그 너머로 영해 들판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오늘 가는 길은 산봉우리를 오르고 내리기를 거듭한 뒤에 영해에 있는 괴시마을에 이르는 코스. 봉수대까지 올랐으면 가장 힘든 구간은 끝난 셈이다. 하지만 아직 길은 멀다. 여기서부터 2시간 이상 쉼없이 걸어야 괴시마을에 닿을 수 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길을 서둘렀다.

까다롭지는 않지만 진땀께나 흘려야 하는 산길이다. 자락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봉우리를 오르고 내려야 하기 때문. 하지만 빽빽하게 둘러싼 해송 사이로 드문드문 뵈는 동해 푸른 물결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산길을 어루고 달래준다. 영덕은 울진과 최대 생산량을 두고 1, 2위를 두고 다툴 만큼 송이가 많이 나는 곳이다. 유난히 송이 수확량이 많은 올해, 영덕에도 송이가 풍년이다.

솔숲 사이를 걸으며 행여 송이가 있을까 싶어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찾을 수 없었다. 하기야 영덕에서도 지품면 등 내륙 쪽으로 가야 송이를 만날 수 있다. 숱한 사람들이 오가는 블루로드 등산길에 송이가 있을 턱이 없다. 길가 소나무 둥치 아래 곳곳이 파헤쳐진 모습을 보며 엉뚱한 곳에서 송이를 찾으려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구나싶어 헛웃음이 났다. 하기야 이것도 재미가 아닌가.

숲길이 조금 지루해질 무렵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망일봉'(望日峰)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로 있으며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시(詩)가 망일봉 표지판에 씌여 있다. 주세붕이 어릴 때 부친이 어쩌다가 죄를 지어 관에 갇히게 됐다고 한다. 옥바라지를 하면서 고을 원님에게 아무리 사정을 했지만 풀어줄 기색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일대를 순시하는 경상도 관찰사를 만나게 됐다. 꿇어앉아 사정하는 어린 주세붕을 본 관찰사는 선처를 약속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관찰사는 시찰을 끝낸 뒤 동헌 앞에서 거적을 깔고 기다리던 주세붕을 본체만체 다른 고을로 떠나버렸다. 주세붕은 관찰사 일행을 쫓아 영해까지 이르렀다. 도중에 지쳐서 쓰러지기도 했지만 과객의 도움으로 영해까지 닿았다. 마침 관찰사가 해돋이를 보기 위해 망일봉에 올랐을 때 주세붕은 그를 좇아 산에 오른 뒤 다시 엎드려 간청했다. 관찰사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효성이 지극하니 시험을 해보겠다. 운(韻)을 띄울테니 시를 읊어보아라. 경치를 잘 그려내면 아버지의 죄를 풀어주마." 알고 보니 관찰사는 주세붕의 됨됨이를 귀히 여겨 수행원을 과객으로 변장시켜 도움을 줬던 것. 그 때 지은 시가 바로 여기에 남아있다. '만약 겨드랑이에 날개가 생겨 날수만 있다면/아득히 먼 만장 구름 위로 한번 날아보련만'. 망일봉에 서면 바로 이런 기분이 든다.

길을 걷다 보면 사진마을과 영해를 잇는 도로가 나오는데 도로 위에 세워진 구름다리를 건너면 된다. 마치 분재처럼 낮게 자란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오솔길을 거닐고 나면 '목은 이색 기념관'을 알리는 팻말이 나온다. 이제 길이 끝난 셈이다. 고려 말 문신이자 유학자인 목은 이색은 괴시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 곳의 이름은 호지마을이었으나 목은이 원나라에 유학할 당시 대학자였던 구양현의 고향마을인 괴시처럼 시야가 넓고 풍광이 아름답다해서 괴시(槐市)로 개명했다고 한다. 영양 남씨의 집성촌인 괴시마을은 고가옥 30여 호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목은 기념관에서 잠시 내려오면 바로 마을길로 접어든다.

블루로드는 동해안의 보석같은 길이다. 17시간이 걸리는 전체 구간을 한꺼번에 종주하려고 욕심낼 필요는 없다. 마음에 드는 구간을 골라, 가족과 함께 거닐면 된다. 바닷가에 있는 위험한 바위구간은 나무데크길로 바꿔놓았다. 놓치기 아까운 길이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영덕군청 관광개발담당 강영화 054)730-6392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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