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도 날 데리고 가면 당장 고향에 가고 싶어. 설이 되면 북에 남은 식구들이 더 그리워져."
지난달 28일 오후 대구 서구 내당동의 한 아파트. 신동일(90) 할머니는 빛바랜 수첩을 뒤적이다 잠시 말을 멈췄다.
피란길에 헤어진 부모님과 둘째 오빠 생각에 목이 메었다. 가족을 추억할 수 있는 사진이 없어 신 할머니는 자신이 쓴 일기를 보며 헤어진 식구들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할머니는 3남1녀 중 막내로, 어머니가 42세 때 낳은 늦둥이였다. 첫째 오빠는 3·1 운동에 참가했다 돌아가셨고 셋째 오빠는 전쟁이 나기 전 공부를 위해 먼저 남한으로 떠났다.
"내 나이가 올해 아흔이니, 어머니가 지금 살아 계신다면 132살일 거야. 둘째 오빠도 100살이 넘었겠구먼."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면. 해방 직후인 1948년 신 할머니 가족은 '반동 분자'로 내몰렸다. 신 할머니의 남편은 먼저 서울로 떠났고 그해 10월 할머니는 자식 넷을 데리고 혼자 남한으로 내려와야 했다. "15살이었던 큰아들 창욱이가 지게에 재봉틀을 짊어지고 난 둘째 아들 창희한테 젖을 먹이면서 삼팔선을 넘었어. 젖을 물리지 않으면 창희가 자꾸 울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몰라."
친정 부모와 둘째 오빠는 "곧 따라갈 테니 남한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 아버지는 소를 타고 셋째 올케와 조카들이랑 같이 내려오고 있었어. 나이 든 부모님이 젊은 사람들 발걸음을 따라갈 수 있나. 먼저 가라고 조카들한테 손을 흔들었대.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지."
60년 넘게 세월이 흘렀어도 고향을 향한 신 할머니의 그리움은 더 짙어 간다. 신 할머니는 북에서 보냈던 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다같이 조상님들 산소도 돌아보고 음식도 먹고 그랬지. 어머니는 설이 되면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며 방에 불을 끄지 않으셨어."
그는 4남4녀를 키우며 손자와 증손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났지만 북에 두고 온 가족이 더 그리워진다.
그리고 70세가 되던 해에 회고록을 썼다. 한문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헌옷을 선물했던 어머니 등 가족들과의 추억을 기록한 것이다.
2006년 신 할머니는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에 선정됐으나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그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해야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았어. 그때 북한에 갔더라면 둘째 오빠 생사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날 이후 신 할머니는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TV에 나와도 보지 않는다. 일평생 그리워했던 둘째 오빠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 아파서다.
신 할머니는 지금도 매일 새벽 기도를 한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으로 전쟁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자신이 죽기 전에 꼭 통일이 되게 해 달라고. "늙으니까 기도 제목이 많아지네. 죽기 전에 고향에 가볼 수 있으려나." 할머니의 고향은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 묻혀 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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