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 낙동강 시대] (30)칠곡 백석마을<2>

"비 안 오면 무(물)제, 큰물 지면 방천제…강마실이라 '제'도 많

옛날 수나무와 암나무 등 팽나무 세 그루로 이뤄진 마을 당산나무(3) 중 두 그루는 죽고 현재 한그루만 남았다.
옛날 수나무와 암나무 등 팽나무 세 그루로 이뤄진 마을 당산나무(3) 중 두 그루는 죽고 현재 한그루만 남았다.
주민들이 고향에 대한 애정을 기려 세운 김학봉 선생 송덕비.
주민들이 고향에 대한 애정을 기려 세운 김학봉 선생 송덕비.

불심이 깊고 높게 서린 도고산(道高山)을 배경으로 흰들갯밭의 기름진 땅을 가진 백석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풍요롭고 깊다. 칠곡군 기산면 노석2리 백석(白石)마을.

강과 산, 하늘과 땅에 대한 믿음과 바람도 다양하다. 비를 내리도록 빌거나(무제) 물이 넘치지 않도록 비는 제(방천제)를 올리고, 마을의 풍요를 바라는 동제를 지내면서 그 믿음과 바람을 하늘과 땅에 전했다. 그 바람은 마을의 기름진 땅과 풍요로운 수확으로 이어졌다.

아름다운 강산과 천지에는 늘 따뜻한 사람들이 함께했다. 마을 젊은이들로 꾸려진 '횃불회'가 산업화 시절 고향 발전을 앞당겼고, 객지에 나간 '학봉 할배'는 돈과 땅으로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을 표시했다.

◆학봉 할배와 고향사랑

'학봉 할배'

백석 사람들은 대구에 살고 있는 김학봉(95) 씨를 이렇게 부른다. 출향인 김 씨가 그동안 고향을 위해 남다른 애정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1970년 말까지 백석의 마을길은 경운기 한 대가 겨우 다닐 정도로 비좁았다. 인근에 교량이 생기고 차량이 늘어나면서 백석에도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넓고 포장된 도로 건설이 절실했다.

곽도근(79) 씨는 당시 마을 사정을 설명했다.

"차가 다니게 하려면 오른쪽 노석1리와 왼쪽 행정2리로 가는 강가 도로를 넓히고 포장해야 할 거 아니가. 포장을 할라니까 노석1리는 1리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큰골에서 서낭당 고개까지 우리 마을만 포장하는 경비가 200만원이 돌아왔어."

노석1리 큰골 쪽에서 행정2리로 넘어가는 서낭당 고개까지 도로를 넓히고 포장하기 위해 200만원이라는 거금이 필요했다. 백석 사람들은 이 같은 사정을 담아 객지의 고향 사람들한테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초기에 편지를 받아본 김학봉 씨가 자신이 경비를 다 부담할 테니 다른 사람들한테는 받지 말라고 했던 것.

"마을에서 돈을 못 구하니깐. 객지에 나간 사람한테 전부 협조해 달라고 편지를 썼어. 그래가 객지에 다 보냈지. 그 할부지(학봉 할배) 집에 안내장이 갔다니까. 그래 할부지가 집안 조카를 불러가지고 '이게 뭣이냐'하니깐, 조카가 '동네 포장 할라니까 경비가 든다고. 객지 일가들한테 도와달라고 편지가 왔습니다'고 하니깐 전부 다 부담한다고 했는거라."

김학봉 씨는 고향마을 도로 확장·포장에 돈을 선뜻 내놓았고, 이후 마을길 주변 논을 사들여 그 논을 동네에 희사하기도 했다.

대구와 경남 김해에 타일 공장을 세워 큰 돈을 번 김 씨는 이 밖에도 마을과 문중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자신이 속한 김해 김씨 문중 앞으로 논 다섯 마지기를 기부하고, 재실도 새로 지었다. 마을 앞으로는 논 열 마지기를 기부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김 씨가 기부한 논을 팔아 88년 마을회관을 새로 지었다.

마을 대표자들은 매년 새해에 대구시 수성구 수성동 김 씨 집을 찾아 세배를 드리며 마을을 위해 힘써준 데 대한 감사를 표하고 있다. 86년 주민들이 마을 입구에 세운 김 씨의 송덕비는 타향살이를 하는 한 노인의 백석 사랑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팽나무와 마을 공동제사

백석마을 남쪽 입구에는 22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그 옆으로 잘려진 나무 밑동이 일부 남아 있다. 지금은 암나무 한 그루만 보존돼 있지만, 원래 수나무 한 그루와 바로 옆 작은나무 하나 등 모두 세 그루가 마을 당산나무였다.

김종갑(78) 씨는"다른 나무가 죽어서 그렇지 여름에 그늘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옛날에 점심 먹으면 마카 거기 가서 그늘에 쉬고 했잖아. 선풍기 없고 하니깐. 동제 지내는 당산나무인 거라"고 말했다.

마을에는 동제를 지내는 정성이 부족하면 당산할매가 노하여 동네 돼지를 잡아간다는 얘기도 있다. 또 제관이 일 년가량 남의 집 흉사에 가지 않고 언행을 조심해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제관의 집안에 해가 미치기도 한다고 했다.

곽도근 씨는 실제로 제관을 지낸 한 사람이 일년이 지나지 않아 동네 개를 잡았는데, 얼마 뒤 그 집 아들이 당산나무에서 떨어져 눈을 크게 다쳤다고 했다.

"당산이라고 한 게 얼마나 영리한지. 옛날 제를 지낸 그 해 여름에 개를 잡았어. 자기가 (제관) 지낸 그 해에. 그 아들 태식(?)이가 당산나무에 올라가서 떨어져 그렇게 됐다. 가지도 안 높은데…."

백석에서는 동제 외에도 기우제인 '무제'와 '도랑장', 홍수를 막는 '방천제' 등 다양한 마을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주민들은 1900년대 초반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도고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무(물)제'라고 불렀다.

김종극(81) 씨는 "마을 어르신들이 산에 올라가 돼지머리를 제수 삼아 제를 지냈는데, 제사를 다 지내고 내려오는 길에 보니 비를 맞고 내려오더라"고 기억했다.

무제와 함께 도랑장도 일종의 기우제였다. 왜관 낙동강 가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열었던 도랑장은 기우제를 대신했다. 현 칠곡 군립도서관 부지 앞에 도랑장이 섰는데, 이 도랑장에서 군수나 읍장이'비를 오게 해 달라'고 제를 지냈다는 것.

"비 안올 때는 왜관 강가에서 도랑장이라고 하면서, 왜관 다리골 밑에서 몇 번이나 지냈지. 거기다 시장처럼 차려 놓고, 처음에는 제를 지냈지. 군수나 읍장이 술을 따라 놓고 제를 올린 뒤 장을 시작했어. 장을 열고 나면 비가 오더라고. 도랑장이 영험이 있는지 비를 많이 봤지."(신이화·77)

반면 여름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와 강물이 넘치지 않게 해달라며 따로 '방천제'를 지내기도 했다.

"음력 6월 15일은 들에 '방천제' 지내는 날이라. 옛날에 방천 터져서 논 쓸어 먹고 그랬잖아. 그래서 하는 건데, 내가 많이 봤어. 옛날에 도리 삿갓(도롱이) 쓰고, 밀가루 밀어서 밀개떡 쪄가지고 절하고, 술 따르고…."(곽도근)

방천제는 낙동강 제방을 끼고 있는 마을의 독특한 제사였다. 비가 많이 와 방천이 터지면 한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이를 막아달라고 하늘에 비는 제사였다.

◆횃불회로 뭉친 공동체

백석 사람들은 구판장, 유치원 등을 모두 공동으로 세울 정도로 협동심이 강하고 끈끈하다. 지금은 40여 가구에 불과하지만, 80년대 초반까지 80가구에 달할 정도로 마을 규모가 컸다.

70년대 후반 마을 젊은이들은 '횃불회'를 구성했다. 마을 공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어 구판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던 것. 구판장은 회원들이 돌아가며 한 달씩 장사를 했는데, 그 수익금 등으로 구판장 옆 자그마한 창고에 마을 유치원도 세웠다.

"마을 사람들이 유아원을 만들었잖아. 면에서 최초로 해보자 해서 했는데, 잘됐어. 영동 1리, 행정 2리 이런 애들이 다 왔다니까. 그러다가 우리가 약목면에 편입되고 약동초등학교에 유치원부가 생기면서 없어졌어."(여영분·62)

백석의 40세 전후 주민들은 모두 백석 새마을유아원에 다녔다.

백석마을은 당시 이 유치원과 함께 방앗간, 이발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김없이 주민들의'사랑방'역할을 했고, 주민들은 이를 중심으로 끈끈한 공동체를 유지해왔다.

현재의 마을 안길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높이고 하수관을 깔았다고 한다. 옛날 비가 오면 물이 넘치고,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이 마르는 건천이 마을 중앙으로 흘렀기 때문에 마을길을 높여야만 했던 것. 마을 안길은 군 사업비에다 주민들이 조금씩 모은 돈으로 충당했다.

"길이 전부 도랑이라. 비 오면 물이 엄청나게 많은데, 골목 밑에 물소리가 엄청 크게 들려. 안길 이거는 우리가 자부담도 좀 했어. 돈을 갹출해가지고 수통(하수관) 있제. 물이 지나갈려면 이 수통을 놓아야 되잖아. 돈을 거두어가지고 수통을 만들었거든. 첨에 물길을 다니다가 물 안 밟고 얼마나 좋으노."(정진악·66)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이가영·김수정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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