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동구 신암 5동 주택가. 저녁 무렵, 중학교 2학년 혜정(가명)이가 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이곳저곳 생각해 보지만 주저앉은 발길이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올해 초 정부 국고보조금이 끊기면서 집 앞 '청소년 공부방'이 갑자기 문을 닫아 혜정이의 고민은 한 달째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혜정이에게 공부방은 큰 도서관이 부럽지 않은 소중한 공간이었다. 오후 4시 30분에 하교한 뒤 6시부터 10시까지 줄곧 공부방에서 자습을 해왔다. 집에서 공부할 때보다 조용해 무엇보다 면학 분위기가 좋았다. 자원봉사자들이 학습지도까지 해 주는 공부방도 있지만 이만 해도 좋았다. 컴퓨터가 비치돼 인터넷 활용도 손쉬웠다. 이곳에 오는 친구는 10여 명. 서로 정보를 주고받다 보니 학습 효과도 쏠쏠했다. 시험기간 때는 학생들이 몰려 자리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부방을 1년 정도 다니자 성적이 꽤 올랐다. 학원 가는 친구도 부럽지 않았다. 공부방에서 '스스로 학습'의 맛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에 행복감도 느꼈다. 그래서 철부지 초등학생 동생도 데리고 다녔다. 이곳에 적응하면 동생이 컴퓨터 게임을 조금 줄일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공부방은 혜정이에게 등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희망의 불빛이 사라져 버렸다.
공부방이 폐쇄된 뒤 혜정이는 동부도서관을 찾았다. 버스로 세 코스, 걸어서는 30분. 꽤 멀다. 게다가 저녁 늦게까지 있을 수는 없었다. 어두운 밤길이 무서워 부모님의 걱정도 많다. 하는 수 없이 안방에서 책을 집어들었다. 텔레비전 쇼프로, 생활 소음, 이것저것 신경쓰이는 게 많아 지난 한 달은 집에서 어영부영 보내고 말았다.
지난해 대구에서는 연인원 13만 명의 학생들이 공부방을 이용했다. 이 가운데 상당수의 학생들이 혜정이와 같은 고민에 빠졌다. 대구시내 공부방 18곳 중 7곳이, 경북에는 29곳 중 7곳이 문을 닫았다. 그나마 살아남은 곳은 구청에서 운영비를 지원하고 있는데 장기지원이 불투명한 상태다.
정부는 공부방을 지역아동센터로 통합하기로 했지만 지난 한 달간 공부방의 중·고교 학생들이 아동센터로 이동한 경우는 거의 없다. 초등학생 보호기능 위주인 아동센터 환경이 중·고교생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공부방 폐지 한 달째, 보다 못한 신암5동 주민들이 '희망의 빛'을 되살리자며 팔을 걷었다. 주민들은 쌈짓돈을 긁어 매월 공부방 운영비로 30만원을 내기로 했다. 지난해 예산 1천660만원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공부방 문은 열고 보자며 구청에 도움을 요청했다.
혜정이는 과연 '공부방의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글·사진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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