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혁명 후 내전기에 탄생한 '붉은 군대'는 창설 초기 매우 '민주적'이었다. 사회주의 이상에 따라 계급 구분이 없어졌다. 장교라는 말이 사라지고 장교 제복과 견장도 폐지됐다. 장교 직책은 '지휘관'으로 대체됐다. 이는 위계(位階)가 아니라 지휘할 능력이나 자격이 있음을 뜻하는 순수한 기능적 개념이었다.
여기에다 지휘관은 사병들의 민주적 선거로 선출됐으며 사병은 1917년 3월 14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공포한 명령 제1호에 따라 지휘관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사병들이 지휘관의 특정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여부를 놓고 장시간 논쟁하는 사태가 자주 빚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규율은 있을 수가 없었다. 1924년 미하일 프룬제 군사혁명위원장이 군을 개혁하면서 장교의 명령권과 처벌권을 포함한 규율 규정을 복구했지만 제국 군대의 악습 부활이라는 공산당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런 전통은 1930년대까지 붉은 군대를 지배하는 정신적 저류였다. 독소전 초반 붉은 군대가 그토록 무능했던 이유도 상당 부분 여기에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싸웠던 국제여단도 '민주화' 과잉이었다. 자원병이 대부분이었던 병사들은 훈련보다는 싸우는 이유에 대한 집단 토론과 회의에 더 열을 쏟았다. 그들은 가장 기초적인 군사 기술에도 무지했을 뿐만 아니라 체질적으로 그것을 싫어했다. 그들은 '앞으로 가' '좌향좌' '우향우' '뒤로 돌아'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한 참전 용사는 국제여단 병사들을 이렇게 평했다. "그들은 '자본론'을 손에 쥐고 있었을 뿐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 싸울 준비를 하지 않았다." 이상은 높고 정의감은 불탔지만 국제여단은 오합지졸이었다.
인천의 한 경찰서장이 소속 의경의 투서로 전격 경질됐다고 한다. 투서의 내용은 과도한 근무로 지쳐있는데 교육을 하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고 TV 시청도 금지했다는 것이다. 그 의경은 이것을 '강압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서장은 규율 유지를 위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민주화와 규율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다. 그 둘이 행복하게 동거할 수 있다면 최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바람을 배반하기 일쑤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참으로 지난(至難)한 과제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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