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의사보다는 좋은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경북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권순학(51) 교수는 인터뷰 내내 '지역사회에 제 역할을 하는 의사'를 강조했다. "대구경북 인구만 해도 500만 명이 훨씬 넘습니다. 굳이 서울로 갈 필요가 없는 환자들까지 부담을 안고도 서울로 찾아갑니다. 물론 지역적 차이는 있겠죠. 시설이나 서비스가 나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의료진의 인적자원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터뷰에 응한 이유에 대해서도 "지역민에게 올바른 정보를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간질 등 소아신경질환의 대가
권 교수가 가장 많이 다루는 질환은 간질(뇌전증)이다. 열성 경련이나 간질 중첩증(지속성 간질)은 분초를 다투는 응급 질환이다. 이 때문에 소아 응급환자 중 절반가량이 그의 환자인 셈이다. 발달장애도 다룬다. 소아신경과를 전공한 권 교수가 소아정신과 분야까지 진료한다는 것은 조금 의외다. "기본적으로 소아과는 아이의 성장과 발달을 다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다면 소아과에서 진료하는 게 맞죠. 부모에게 '정신과'에 가라고 하면 거부감부터 갖습니다."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학습장애도 함께 본다. "미국에서 소아과를 공부했는데, 그곳에선 소아신경과와 소아정신과를 함께 다룹니다. 그게 맞다고 봅니다."
처음 정신과 분야에 대한 진료를 하고 그에 따른 처방을 내린 뒤 건강보험공단에 치료비를 신청했다가 삭감당한 적도 많았다. 왜 신경과 쪽에서 정신과 처방을 자꾸 내느냐는 것이었다. "가령, 지능검사도 마찬가집니다. 다른 지역에선 대부분 발달장애 아동의 지능검사를 정신과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능검사 처방을 내니까 자꾸 삭감하는 겁니다." 그는 장문의 소명서를 내고 환아를 위해서 정신과가 아닌 소아과에서 지능검사를 하는 것이 옳다고 강변했다. 지금은 삭감되는 일이 없어졌다.
권 교수를 찾는 환자 중 대부분은 난치성 질환이다. 간질과 관련이 있다. 간질은 아직 완치가 어려운 질환이다. "현대 의학도 간질에 대해 빙산의 일각밖에 모르고 있습니다. 간질을 찾아보면 뚜렷한 정의가 나오는 게 아니라 증상만 나열할 뿐입니다. 해결하지 못 하는 부분이 더 큰 셈이죠." 그래서 그는 경력이 쌓여갈수록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가정 내 인공호흡기 처음 도입
한계를 절감할 때가 많다는 말이다. 간질은 생후 1년 이내에 가장 높았다가 급격히 낮아지고 청소년기와 장년기에 걸쳐 낮은 발생률을 유지하다가 60세 이상 노년층에서 다시 급격히 증가한다. 소아기에는 뇌기형, 뇌수막염 등으로 손상을 입었을 때, 노년기에는 뇌졸중, 치매 등이 간질의 주요 원인이 된다. 하지만 워낙 원인이 다양해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평생 한 차례 이상 경련을 일으킬 비율은 전체 인구의 10%라고 합니다. 대부분 열성경련이고, 흔히 간질로 부르는 뇌전증(뇌에 발생하는 전기적 증상이라는 뜻)은 1% 정도입니다." 1%라는 유병률은 결코 낮지 않다. 대구 시민 2만5천여 명이 간질을 앓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들 중 하루 수십 차례 경련을 일으키는 중증도 있고 1년에 한 번도 경련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난치성 근육질환이나 척수성 근위축증을 앓고 있는 환아들도 그를 찾는다. 사실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가 어려운 병들이다. 척수성 근위축증은 대개 만 1, 2세까지 생존한다. 하지만 그의 환자 중 한 명은 7세가 넘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적극적인 대처 덕분이죠. 집에서 인공호흡기를 달도록 했습니다. 처음엔 부모가 반대했죠. 하지만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가정이 흔들립니다. 비록 인공호흡기를 달았더라도 가정에 있으면 일상을 유지하면서 치료가 가능합니다."
환아의 엄마는 간호사 수준이 다 됐다. 이메일로 증상에 대한 대처를 문의하기도 한다. 가정 내 인공호흡기는 국내에서 첫 시도였다. 학회 등에서 결과를 발표한 뒤 지금은 여러 곳에서 시행하고 있다. 현재 권 교수의 환자 중 5명이 가정 내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다. 이런 적극적인 처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환자 부모와의 밀접한 관계가 성립됐기 때문이다.
◆해외신약 보험적용 지루한 설득
그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다투는 일이 잦다. 난치성 질환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신뢰할 만한 외국 논문에서 특정 약물이 효과를 봤다는 내용이 실리고, 권 교수가 판단하기에 설득력이 있다면 그는 곧바로 그 약을 사용한다.
"제가 마음대로 쓰는 약이 좀 많습니다. 하하하."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그간의 과정은 수월치 않았다. 당연히 외국에서 쓰는 신약은 보험적용이 안 된다. 하지만 그는 보험으로 청구한다. 삭감당하면 다시 장문의 소명서를 쓰고 지루한 싸움에 들어간다. 귀찮고 수고로운 일이지만 환자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온갖 약을 써도 경련이 멈추지 않고 차도가 없던 한 환자에게 신약을 썼더니 기적적으로 완치된 일도 적잖았다. "매일 최신 논문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난치성 질환을 다루는 만큼 안타까운 죽음도 많이 접한다. "입원기간이 길어지면 환아 부모들끼리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됩니다. 난치성 간질, 근위축증, 유전성 질환을 앓고 있는 세 아이가 있었는데 결국 모두 숨을 거뒀습니다."
마지막 아이가 숨진 뒤 장례를 치른 아이의 엄마와 다른 두 아이의 엄마가 찾아왔다. 아이의 죽음을 알리러 왔다는 그 엄마들은 권 교수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낮시간이지만 술도 마셨다. 눈물을 떨구며 엄마들은 고맙다고 말했다. 현대 의학으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의사도 알고 부모도 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줘서 고맙다는 말이었다. "비록 아이를 치료하지 못 했지만 제 역할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권 교수를 찾는 환자는 한 달에 1천여 명. 이들 중 10%가량은 난치성이어서 어느 날 숨을 거둘지 모른다. 또 10%가량은 완치돼서 병원을 나가기도 한다. 나머지 70~80%는 병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환자들이다.
"당장 완치는 못할지언정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병과 함께 사는 거죠. 힘들지만 언젠가 치료약이 개발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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