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천 등 '산남의진' 의병장 정환직·용기 父子

아들 전사하자, 64세 老將도 앞장서 장렬한 순국

성영관 영천문화원장이 문화원 앞들에 세운 산남의진비를 소개하고 있다.
성영관 영천문화원장이 문화원 앞들에 세운 산남의진비를 소개하고 있다.

을사조약 직후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은 정환직(鄭煥直)은 고향 영천에 내려와 계몽운동을 벌이고 있던 아들 용기(鏞基)에게 의병을 일으키게 했다. 이에 1906년 3월 정용기·이한구·정순기·손영각 등이 거병하고, 청송의 임용상이 합세한 것이 경북 동남부 지방에서 활약한 산남의진(山南義陣)이다.

그런데 동해안의 신돌석 의진과 연합전선을 펼치기 위해 진군하던 정용기가 관군의 속임수에 빠져 체포되면서 일단 해진했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석방된 정용기는 이듬해 4월 2차 산남의진을 일으켰다.

중군장·참모장·소모장과 집사에 이르는 짜임새 있는 대오를 편성하고 일본군 수비대가 있던 청하를 공격해 점령하자 일본군은 의병대장의 고향인 영천 검단리(현 충효동)를 불태우는 보복을 저질렀다.

후기의병기를 맞아 우재룡이 지휘하는 해산군인이 합류하면서 전장은 보현산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군위, 동쪽으로는 흥해에 이르렀다. 강릉으로 북상을 꾀하던 산남의진은 영일군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려다 오히려 역습을 받아 정용기를 비롯한 지휘자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2차 산남의진이 무너지자 정환직은 6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뒤를 이어 의병장으로 나섰다. 그는 이세기·우재룡 등과 보현산 및 영일 북동대산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경기도를 중심으로 13도창의진이 편성되고 서울 진공작전을 시도하자 부대를 관동지방으로 북상시키던 정환직은 청하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영천에서 총살로 순국했다.

'몸은 죽으나 마음마저 변할소냐(身亡心不變), 의로움은 무거우나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義重死猶輕), 뒷일을 누구에게 맡기리오(後事憑誰託), 말없이 새벽까지 앉았노라(無言坐五更)'. 아들을 앞세우고 순국한 노의병장이 남긴 절명시이다.

조향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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