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⑪동산병원과 사과나무

파란눈 '닭털' 앞에 발걸음한 사람들 "병 고쳐주면 예수 믿겠소"

동산병원 선교 박물관
동산병원 선교 박물관
동산병원 선교 박물관 내부
동산병원 선교 박물관 내부

◆대구 첫 제왕절개수술 성공 고름 봅아 앉은뱅이도 벌떡

동료와 함께 심은 사과나무 전국 최고 산지로 만든 계기

사람들은 이제 파란 눈의 외국인 의사를 경계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멀리서 존슨이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습이 보일 때면 "닭털! 닭털!" 외치며 닭 울음소리를 흉내 냈다. 그 아이들에게 존슨이 자전거의 벨을 울려 화답할 때면 아이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을 받은 듯 목구멍을 벌려 깔깔거리며 웃었다.

진료 시작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지만, 병원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줄지어 있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사람들을 지나 존슨이 병원으로 들어서려 할 때, 한 남자가 다가와 바구니를 펼쳐 보였다. 남자는 교회의 신자이기도 하고 몇 해 전 백내장을 치료받은 이의 아들이기도 했다.

"선생님, 성공입니다. 이번엔 아주 굵은 알이 열렸습니다요."

바구니 속에는 몇 해 전 선교사 일행이 보급한 나무에서 열린 사과 여섯 알이 담겨 있었다. 아직 착색이 이루어지지 않은 연한 분홍빛이었지만 알은 굵고 단단해 그 수확의 모습을 짐작해볼 만했다.

"신맛이 가시진 않았지만 아직 유월이니 한 달 후면 훌륭한 맛을 낼 겁니다요."

7년 전, 제중원을 동산으로 이전하여 신축하던 때, 존슨은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사과나무 묘목을 수입해 사택 뜰 안에 심었었다. 당시 대구에는 밤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 등 과실나무가 많긴 했지만 대량 생산을 통해 경제적 수익을 올릴 만한 과실나무가 없는 터였다. 존슨은 중국 산둥성으로 간 선교사들이 보급한 과실나무가 그곳 토양에서 잘 자라더라는 말을 듣고 대구에도 사과나무를 수입해 확산시킬 것을 동료 선교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었다. 하지만 어렵게 미국에서 들여온 사과나무는 조선 땅에서 잘 자라지 못했다. 고민 끝에 수입한 묘목에 신맛을 내는 조선 토종 능금나무를 접붙여 교회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재배할 것을 권했고, 사람들은 빈 땅에 조금씩 사과나무를 심어 기르기 시작했다. 일교차가 크고, 덥고 습한 대구는 사과가 자라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고, 오늘에서야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그 소식은 존슨의 지친 몸과 마음을 개운하게 씻어주어 지나온 날의 회상에 차오르게 했다.

존슨이 스물여덟의 나이로 대구의 의료 선교사로 오던 1897년, 대구의 아침은 자고 일어나면 곡소리로 가득했다. 파랗게 식은 아이의 시신을 안은 어른들의 통곡소리와, 몸에 붙은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해 민가 곳곳에서는 굿 소리가 요란했다. 당시 대구의 의료상황은 사막이나 마찬가지였다. 읍성 주민들의 위생 상태는 불량했고 결핵, 말라리아, 나병, 기생충 감염이 성행하고 있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의료기관은 서울에 몰려 있었고, 지방에는 탕약과 침으로 병을 다스리던 전통의학이 있긴 했지만, 서민들에겐 손길이 미치지 못해 민간처방에 기도와 주술을 더한 자연의 순리가 치료요법의 전부였다.

하지만 비위생적인 환경에서도 여자들은 한 해에 한 명씩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낳고도 여자들은 다음날이면 밭으로 나갔다. 천연두에 걸려 살아남을 때까지 아이들에게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여러 가지 병으로 자꾸 죽었다. 오래 장수하기를 바라며 사람들은 자라의 피를 먹었고, 병이 나면 말린 두꺼비나 지렁이를 고아 먹었다. 곪아 터진 자리에는 쑥을 붙여 뜸을 놓았지만 환부는 열 기운 때문에 화농이 더욱 번져 세균 감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귀신을 쫓기 위해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존슨은 작은 기와집 한 채를 얻어 '미국약방'이라는 간판을 걸고 진료소 개원을 준비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존슨은 대구에 오기 전 프랑스 신부가 주민에게 수염이 뽑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백인 선교사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와 대문을 부수거나, 밤중에 방문에 구멍을 뚫어 엿본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 말을 입증하듯 존슨이 가마니에 쌓인 아이의 시신 앞에서 기도를 할 때면 사람들은 죽은 아이에게 서양귀신이 붙어 구천을 헤매게 할 거라며 돌팔매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존슨은 그런 것이야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더 좋은 삶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그 삶에 불만을 품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불만하지 않는 삶에 누군가 나서서 더 나은 삶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지금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존슨은 무엇보다 그들의 삶 속에 숨 쉬고 있는 신(神)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비록 그들의 신이 존슨이 알지 못하는 모습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다른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존슨이 선교를 다니던 마을 앞에는 수만 마리의 송충이 떼에 뒤덮여 죽어가고 있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 전체가 송충이로 이루어진 것 같은 기괴하고 흉측한 나무여서 나무는 송충이 나무라고 불렸다. 골목을 지날 때면 송충이 서너 마리가 머리 위로 떨어지기 예사였고, 떨어진 송충이들은 초가집 안방으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아이와 여자들을 기겁시키기 예사였다. 나무는 몇 해 동안 마을의 골칫거리였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무를 베지 않았다. 그 나무에 신(神)이 살고 있기에 함부로 베어선 안 된다는 게 까닭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죽는 것도 신이 떠나 그런 것이라 믿었고, 아이가 밤새 보채다가 다음날 싸늘히 죽는 것도 신이 떠나 그런 것이라 믿었다. 그들이 말하는 신이 하느님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지만, 존슨은 하느님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다른 이름, 다른 모습으로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믿었다. 그 믿음 속에서 존슨은 한센병에 걸린 이의 고름을 맨손으로 닦아 주었고,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대신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법을 익혔다.

그들의 눈에는 파란 눈의 외국인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죽음을 앞둔 자들의 발걸음은 존슨의 작은 기와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내 눈을 고쳐주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소." "어머니의 다리를 고쳐 준다면 예수를 믿을 것이오." 절박함에 몰린 그들의 눈동자는 불쌍하고 여린 짐승의 얼굴과 닮아 있어, 존슨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서라도 그들을 치료하고 싶은 간절함이 나날이 더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은 백내장 수술의 결과였고,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난 기적은 관절염을 앓는 무릎에서 고름을 뽑아낸 것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존슨의 치료에 기적을 체험한 듯 "하느님이 내 병을 고쳐 주셨다"고 말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한센병 치료의 이야기는 제중원의 명성을 드높여 사람들은 나날이 제중원으로 몰려들었다.

존슨이 꿈을 꾸듯 지난 세월에 잠겨 있을 때,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과 함께 다급한 표정의 남자가 진료실로 뛰어들어 왔다. 들것에 실려 온 임신부는 자궁이 아래쪽으로 이동하면서 질을 통해 빠져나오는 자궁 탈출증이었다. 당시 조선의 산모들은 제대로 산후조리를 하지 않고 일하러 가는 일이 흔했기에 자궁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여자들은 자궁에 질산을 바르거나 뜨거운 인두나 기왓장으로 자궁을 지져 고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하면 자궁이 빠지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궁을 막아서 더 이상 자연 출산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존슨은 이러한 환자를 예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손을 쓰기도 전에 대개 아기는 죽어 있었다. 존슨은 잠시 지체할 틈 없이 메스를 들었다. 붉게 배어 나오는 핏물 위로 자신도 모르게 기도가 흘러나왔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수술은 성공이었다.

잠시 후 창밖에서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존슨의 수술 소식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병원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산모의 남편 되는 이의 외침이 들렸다. "선생님이 아기를 구했습니다! 하느님이 아기를 구했습니다!" 손뼉 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꽃처럼 가득했다. 유월의 볕을 머금은 사과처럼 붉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존슨은 그들의 기쁨에 찬 얼굴을 바라보며 가슴과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슬픈 것을 같이 슬퍼하고 기쁜 것을 같이 기뻐하는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존슨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탁자 위의 사과에 눈을 돌렸다. 한 입 베어 물자 사과의 과즙이 배어 나왔다. 떫고 신맛이 남아 있긴 하지만 얼마 후면 사과는 깊은맛을 가질 것이다. 이제 시작된 농사지만 머지않아 이 과일은 대구 지역민에게 큰 경제가치를 안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궁핍한 삶은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

존슨은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오기로 결심하던 때, 오랜 기도 끝에 들었던 하느님의 음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가슴에 두 손을 모았다. 가슴에 차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사랑 속에서 다시 그날의 음성이 고요히 번져왔다.

'그곳에서 너는 너를 세상의 방관자가 아닌 진실한 참여자로서 느끼게 될 것이다. 네가 시작하기만 하면 너는 너에게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니 모든 의심이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막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가장 복된 곳으로 가고 있음을 기억하여라.'

1909년 6월 27일, 존슨이 행한 제왕절개수술은 훗날 대구 최초로 성공한 제왕절개수술로 기록되었고, 존슨이 동료 선교사들과 심고 보급한 사과나무는 훗날 대구를 전국 최고의 사과 재배지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김계희(그림책 작가)

◇영남 최초 서양 의료기관 제중원 설립 존슨 박사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의사 교육을 받은 존슨(Woodbridge O. Johnson) 박사는 젊은 시절 외국 사람들의 영적, 육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데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존슨은 1897년 그의 부인과 함께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의 대구선교지회에 의료 선교사로 파견된다. 대구에 온 존슨 박사는 한옥 한 채를 얻어 '미국약방'이란 간판을 달고 약품을 팔며 진료소 개원을 준비한다. 그리고 1899년 12월 성탄절을 앞두고 그 자리에 영남지역 최초의 의료기관인 '제중원'을 연다. 1903년 존슨은 제중원을 동산 언덕으로 옮겨 벽돌집으로 건립하였고, 제중원은 제2대 원장 플래처(Archibald Gray Fletcher) 박사에 의해 '동산의료원'으로 개명되었다. 동산의료원은 1980년 의과대학을 설립해 계명대학교와 병합하고, 1982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거듭난다.

존슨 박사는 조선의 젊은이를 선발해 처음으로 서양의학을 가르쳤고, 한국 어린이 사망률 50%에 해당하는 천연두 예방백신을 대량 보급해 영아 사망률을 크게 낮추는 데 기여했다. 또한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한센병환자를 수용하며 치료를 시작한 일은 대구 한센병 환자 요양사업의 시작이자 오늘날 대구애락보건병원의 모태가 되었다. 16년간 수많은 업적을 쌓은 그는 건강악화로 1912년 영구 귀국, 1951년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존슨 박사가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에서 들여온 사과나무는 대구 시민들에게 널리 보급돼 훗날 대구를 전국 최고의 사과 생산지로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재 동산병원 선교 박물관 앞 정원에는 대구 최초의 사과나무인 손자목이 대구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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