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꽂히는 시선이 즐겁다, 나는 모델이다

대구컬렉션 패션쇼 현장을 가다

화려한 옷을 입고 우아하면서도 도도한 걸음걸이로 캣워크를 활보하는 패션모델.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마치 물 속에서 열심히 발을 젓고 있는 백조처럼 끊임없는 자기 노력이 필요한 직업이다. 캣워크 중인 모델. 모델들이 리허설이 끝나고 잠시 여유가 생기자 친구들과 함께 장난을 치고 있다. 분장 중인 모델들.(위쪽부터)
화려한 옷을 입고 우아하면서도 도도한 걸음걸이로 캣워크를 활보하는 패션모델.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마치 물 속에서 열심히 발을 젓고 있는 백조처럼 끊임없는 자기 노력이 필요한 직업이다. 캣워크 중인 모델. 모델들이 리허설이 끝나고 잠시 여유가 생기자 친구들과 함께 장난을 치고 있다. 분장 중인 모델들.(위쪽부터)

9일 오후 대구 북구 산격동 한국패션센터에서 열린 제23회 대구컬렉션. 행사의 시작은 디자이너 최복호 씨의 패션쇼였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일제히 조명이 꺼지고 쿵쾅쿵쾅 흥겨운 배경음악이 고조된다. 몇 초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번쩍하고 일제히 조명이 켜지자 이윽고 섬광같은 빛들을 뚫고 우아하면서도 도도한 '그녀'가 캣워크(Cat Walk)로 활보하기 시작한다. 20m 남짓한 무대를 돌아오는 시간은 고작 30초 남짓. 하지만 한 무대에 보통 2, 3명의 모델이 엇갈려 나오기 때문에 그녀가 단독으로 시선을 차지 하는 시간은 10~15초에 불과하다. 하지만 무대 위에 선 '그녀'에게는 꿈결과도 같은 황홀감을 가져다주는 순간이다. 이 시간 만큼은 세상이 바로 그녀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녀, 바로 패션쇼에 선 모델이다.

◆패션쇼 무대 뒤편은…

이날 대구컬렉션 패션쇼는 오후 1시 30분, 3시 30분, 5시 30분 등 세 차례 열렸다. 하루 전날 서울에서 내려온 25명의 모델들은 오전 7시 30분부터 온종일 무대 뒤에 대기하며 리허설을 반복해야 했다. 편안히 앉아 메이크업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모델마다 외모와 체형에 맞는 의상을 배정받고, 리허설을 한 번 하고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또다시 무대 한 바퀴 돌고와서 눈화장을 해야 했다. 그러기를 오전 내내 반복하고 나니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지쳐버렸다.

의자에 앉아 무릎을 껴안은 채 잠이 들기도 했고, 의자 몇 개를 길게 붙여놓고 누워버린 모델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의욕 넘치는 20대 초반 여성이다 보니 이내 피로를 털어내고 동료들과 함께 셀카를 찍는 등 장난기 가득한 모습도 보였다.

취재 차 "사진좀 찍어도 되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쳤다. 대부분 헐렁한 티셔츠 차림에다 아직 메이크업도 마무리되지 않았고, 더구나 가발을 쓰기 위해 망사로 머리를 둘둘 말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한 모델은 "명색이 모델인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오후 1시 20분을 넘어서자 무대 뒤는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각자 의상을 입고, 출입구 앞에서 마지막으로 머리와 의상 상태를 점검했다. "가발 순서, 정확하게 알고 있지? 누구한테 받아야 하는지 꼭 확인해."

똑 같은 디자인의 가발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다보니 모델들은 가발을 번갈아 쓰면서 무대에 서야했기 때문이다. "나 하이라이터로 코 좀 세워주세요", "보디로션 어디있어요?" 막바지 점검을 하는 모델들의 목소리가 이리저리 엇갈렸다.

예정보다 조금 늦은 오후 1시 40분, 음악이 울려퍼지고 쇼가 시작되자 무대 뒤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워킹을 마치고 무대 뒤로 들어온 모델이 다음 의상을 갈아입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기껏해야 10여 초 남짓. 옷 매무시를 가다듬고, 의상에 적합한 구두를 바꿔 신고, 헤어까지 제대로 정리해야 하다보니 모델도, 그녀를 돕는 헬퍼(도우미)도 그야말로 무아지경이다.

갑자기 모델들의 순서와 입장을 조절하는 무대 조감독이 황급히 한 모델의 이름을 불렸다. 다음 순서인데 아직 무대 입구에 대기하지 않은 것이다. 한 손에 가발을 집어든 모델 한 명이 급하게 뛴다. "저 가발 좀 씌여주세요" 헤어 담당이 뛰어와 가까스로 가발을 씌웠다.

한쪽에선 누군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모델에게 신발이 안 맞아요"라고 외쳤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리허설할 때 점검 안 하고 뭐했어? 이제와서 어쩌라고? 안 맞으면 그냥 구겨넣어서라도 신겨!"

그렇게 전쟁같은 30여 분이 지나고, 피날레 무대까지 완벽하게 마친 후 모델들은 무대 뒤 분장실로 몰려들어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휴식을 취할 여유는 없다. 곧바로 2시간 후 진행될 다음 쇼를 위한 리허설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의상 콘셉트에 따라 헤어와 메이크업도 다시 손을 봐야한다. 이날 이들의 일정은 오후 6시 30분이 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일을 시작한 지 꼬박 11시간 만이었다.

◆마약과도 같은 황홀감

유희진(25) 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모델 일을 시작해 벌써 8년째다. 길거리에서 모델학원 관계자에게 캐스팅되면서 갑작스럽게 모델 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케이스다. 이후 고 3때 슈퍼모델대회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모델수업에 나섰다.

희진 씨는 모델의 매력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봐 줄 때 마치 여신이 된 것과 같은 황홀감에 빠져든다"며 "그 기분에 중독돼 끊임없이 무대를 갈구하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하나뿐인 옷을 입고, 완벽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을 갖추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그 몇 초를 위해 그녀들은 연습실에서, 또 무대 뒤에서 보내는 수많은 고통과 긴장의 시간을 감내하는 것이다.

모델 중에서는 남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주목받기를 즐기는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다. 모델 6년차라는 강민영(22) 양은 "삼촌이 모델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모델이라는 직업에 관심이 많았다"며 "워낙 시선을 끄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고3 때부터 모델학원을 다녔다"고 했다.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현실은 팍팍하다. 톱모델이 아니고서는 수입이 그리 많지도 않은데다, 시즌과 비시즌이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에 적은 수입마저 들쭉날쭉하다. 민영 씨는 "쇼마다 받는 금액이 다 다른데, 수입은 비밀"이라며 "대신 그렇게 열악한 상황도 아니지만, 화려해 보이는 만큼 많은 금액도 아니다"고 털어놨다.

더구나 연예인과 함께 무대에 서는 날일 경우 모델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모델들이 한 번의 패션쇼를 위해 4, 5일 동안 워킹 연습을 하고 피팅을 하는 반면, 연예인들은 자신의 치수를 미리 말해주고 당일 20분 정도 무대에 서는게 고작이다. 그런데도 연예인들은 1천만원대를 넘는 고액의 출연료를 받는다. 희진 씨는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즐거움이기 때문에 이것을 돈으로 따질 일은 아니지만, 가끔 연예인들과 함께 무대에 설 때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끊임 없는 자기관리가 성공 비결

키가 크고 쭉 뻗은 몸매를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관리가 있어야만 지속적으로 무대에 설 수 있다.

김지현(24) 씨는 늘 자신이 섰던 무대를 모니터링 한다. 그날의 워킹과 톱 포즈(턴을 하기 직전, 무대 끝에서 포즈를 잡는 것)를 꼼꼼히 체크하고 어색한 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다. 지현 씨는 "컬렉션 동영상을 다운로드 받아서 보거나, 패션 전문 케이블채널 등을 통해 방송되는 패션쇼를 거의 다 챙겨보는 편"이라며 "내 무대도 확인하지만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며 공부하는 것"이라고 했다.

희진 씨는 "집에 돌아갔을 때 몸이 피곤하고 지쳐야지 '오늘도 열심히 일했구나'라는 만족감이 든다"는 노력파다. 하루종일 일을 했는데도 몸이 피로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내가 뭔가를 빠뜨렸나, 일에 소홀했나'를 스스로 점검해보게 된다는 것. 사실 희진 씨는 모델로서는 좋지 않는 체격 조건을 가졌다. 키는 178㎝로 훤칠하지만, 대신 체중 48㎏ , 44사이즈의 너무 깡마른 몸매가 불만인 것. 희진 씨는 "모델은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에 몸을 맞춰야 하다보니 쇼장에서 이옷 저옷을 입어보고 치수가 맞지 않으면 다른 의상으로 교체하는 수밖에 없다"며 "이때문에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근력을 키워 탄력 있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신발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패션쇼에 준비되는 구두는 255~260㎝. 이보다 발이 크거나 작을 때는 그냥 신발에 발을 맞추는 수밖에 없다. 모델치고는 235㎝의 작은 발을 가진 희진 씨는 그래서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신발이 크다보니 깔창을 깔거나 앞 코에 휴지나 신문지를 쑤셔넣어 신어야 한다. 내 발보다 큰 신발을 신고 파워 워킹을 하다보니 가뜩이나 높은 굽에 더욱 균형잡기가 힘들죠. 그래도 불평할 수 없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무대에서만은 고고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모델의 기본이니까요."

모델은 수명이 짧다. 인터뷰에 응한 3명만 해도 경력이 6~8년인데, 벌써 고참에 속한다. 패션의 속성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보니 모델 역시 늘 '새로운 얼굴'를 선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법원 판례에서는 여성 모델의 정년을 35세로 봤다. 화보사진 촬영 중 숨진 여성 모델의 가족이 촬영 관계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다. 이와 관련 재판부는 "모 협회에 등록된 여성모델의 94%가 30대 이하인 점 등에 미뤄 여성패션모델의 가동연한은 만 35세로 보는 게 옳다"고 밝힌 것이다.

그래서 경력이 쌓일수록 모델들의 고민도 깊어진다.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하지만 쉽지가 않은 것. 희진 씨는 "앞으로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할 예정"이라고 했다. 모델에 대한 애정이 깊은 만큼 앞으로 그녀와 같은 꿈을 가진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이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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