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예수 말씀에 잘 나와 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휩쓸었을 때 뉴올리언스의 은퇴한 대주교 필립 M. 해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미국 시민은 성적 방종과 가족 해체, 마약 중독, 연간 4천500건에 이르는 낙태 수술과 몇몇 신부들의 수치스런 행동에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벌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비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카트리나도 허리케인 리타도 그에 대한 징벌일 뿐입니다."

자연재해는 신의 징벌이라는 이런 주장은 이슬람권도 예외가 아니다. 2004년 서남아시아 쓰나미를 사우디아라비아 법무부 보좌관은 이렇게 해석했다. "세상의 창조주가 주신 코란을 읽은 사람이라면 왜 그 나라들이 파괴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일삼고 죄악을 저질렀으며 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코란을 읽은 사람이라면 쓰나미가 바로 그 결과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개신교 쪽의 해석은 조금 달랐다. 당시 서울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8만 5천 명이 사망한 인도네시아 아체는 3분의 2가 모슬렘이고 반란군에 의해 많은 그리스도인이 학살당한 곳이며, 3만∼4만 명이 죽은 인도의 첸나는 힌두교도들이 창궐한 곳이다." 알라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야훼를 믿지 않고 기독교도를 박해해서 신의 진노를 샀다는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알라의 징벌인가 야훼의 진노인가.

대형 자연재해가 인간을 덮칠 때마다 신의 진노라는 해석이 우리 귀를 시끄럽게 한다. 이번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일본 대지진은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며 그 계보를 이었다. 과연 그럴까. 신을 믿으면 재해가 없고 일어난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신은 전지전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지 못할 리 없다.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믿으려는 자도 아실 것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1755년 리스본을 파괴한 대지진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지진은 11월 1일 가톨릭 최고 축일인 만성절(萬聖節-하늘에 있는 모든 성인을 흠모하고 찬미하는 날), 그것도 신자들이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기 위해 성당에 빼곡히 들어차 있던 오전 9시 30분에 일어났다. 지진에 이은 해일과 화재까지 겹치면서 1만 5천 명에서 6만 명이 죽었고 도시는 폐허가 됐다. 이 재앙으로 리스본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절망에 빠졌다. 도대체 신성한 하느님의 계획 어디에 이런 재앙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자비로운 하느님이 수많은 무고한 사람을 지진과 해일로 죽게 하신다는 말인가? 무슨 목적으로? 그것도 경건한 신앙의 도시 리스본에 왜 이런 재앙을 내리셨나? 이런 성찰적 질문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세상이 신의 섭리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는 생각과 결별하고 계몽주의와 과학적 사고를 받아들이게 했다.

"대지진은 하나님의 경고"라는 발언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섬뜩한 협박이 묻어난다. 그것은 예수 가르침의 본질, '사랑'과 거리가 멀다. 예수의 사랑은 차별이 없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의 사랑이다. 기독교가 공포스럽고 질투심 많은 신이 지배하는 셈족의 토속 종교에서 인류의 보편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의 이러한 무조건적 사랑 때문이 아니었던가. 고대 유대의 랍비 힐렐은 율법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네가 행하기 싫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주석(註釋)일 뿐이다." 오늘날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나머지는 주석일 뿐이다."

기아와 고통의 땅 수단에서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다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태석 신부의 불꽃 같은 삶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의 사랑이 있었다. 개신교 목회자도 이 신부와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많음을 안다. 하지만 세상에는 종교를 믿지 않아도 착하게 사는 사람도 많다. 대지진으로 죽고 고통받는 일본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지진은 하나님의 경고'라는 발언은 참으로 가당치 않다. 우리 개신교 일부 기성교단은 속세의 권세와 부를 지향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비판이 잦아들지 않으면 교회는 사람들과 멀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 말씀에 잘 나와있다.

鄭敬勳(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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