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생복 피 서너 방울

옛날 일본의 어느 수학자가 복어의 독을 먹고 죽었다. 그 노교수는 연구의 피로를 복국 국물의 시원함으로 풀기 위해 연구소 인근 복국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주인은 교수가 현관문에 들어서기만 하면 싱싱한 복어의 목을 따고 생피를 받아 식탁에 올렸다.

그 양은 한두 방울이 넘지 않을 정도의 미량이었다. 그는 복어 피를 복국 국물에 넣어 마시고는 독이 주는 마비의 쾌감을 황홀하게 즐기곤 "오이시이 오이시이"(맛있다) 하며 문을 나섰다.

노교수의 당시 연구과제는 컴퍼스 하나로 정칠각형을 그리는 것이었다. 몇 년째 정칠각형 화두에 매달렸지만 구할 듯 구할 듯하면서도 답은 구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 무렵 해머가 뒤통수를 내려치는 것 같은 깨달음이 있은 다음 답을 알아냈다. 그는 너무너무 기쁜 나머지 그리는 방법을 메모해 두지 않고 복국 집으로 뛰어갔다.

"내가 드디어 해냈네. 어서 한 그릇 주게." 주인은 평소대로 생피 접시를 식탁에 올렸다. 노교수는 히레사케(복 지느러미구이 청주) 한 잔을 청해 마시면서 "피 한두 방울을 더 달라"고 요구했다. 노교수는 '병 속의 새'만큼이나 어려운 화두의 답을 얻자마자 붉은 독이 만다라가 되어 휘날리는 저승길을 따라 열반에 들고 말았다. 정칠각형은 지금도 영구미제로 남아 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복국을 좋아한다. 복국 국물이 술독을 풀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속해 있는 일생스쿠버 멤버들도 복국을 좋아한다. 자주 복국 집에 모여 시원한 막걸리로 내장 곳곳을 청소한다. 그리고 회원 자녀의 혼사가 있게 되면 댕기풀이 의식으로 참복 회 한턱을 반드시 내야 한다. 그건 다산 선생이 가까운 벗들과 죽란시사(竹欄詩社)란 모임을 만들어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나 자녀가 과거에 합격했을 때 잔치를 벌이는 것과 흡사하다. 조만간 한 소식 있으면 좋으련만 회 값 마련이 어려운지 종종 무소식이다.

일생 멤버들은 일본의 수학자처럼 복어 피를 복국에 넣어 먹을 정도의 마니아들은 아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복국으로 해장을 한다. 지난겨울 에이스 멤버 하나가 먼저 이승을 떠났다. 친구를 묻고 오는 길에 그가 자주 다녔던 원대오거리에 있는 자갈마당 복어집(053-358-7112)에 모여 추모 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런데 이날만은 국물을 후루룩거리며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먼저 가버린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미움이 반반이 되어 눈물이 범벅이 된 막걸리 사발만 기울였다. 나는 평생에 흘릴 눈물을 이날 다 쏟아 내 이젠 울어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주문진에서 복어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생 팀의 긴급회의가 열렸다. 내용은 간단했다. '1박 2일, 전원 참석, 1인 1병.' 우리는 술 1병씩 꿰어 차고 강원도로 출발했다. 제법 씨알이 굵은 참복 두 마리와 밀복 세 마리를 20여만원에 흥정했다. 회가 나오기 전에 서비스 안주로 허겁지겁 마시느라 반쯤 취했는데 기다리던 복어회가 나왔다. "눕을 젓가치 넣지 마,(젓가락을 눕혀서 많이 집어 가지 마) 술 한 잔에 회 한 점이야." 아무리 경고 방송이 울려도 접시 위의 복어 회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삽시에 사라지고 만다.

보리밥이나 개떡처럼 배부르게 먹을 음식이 있고 더 먹고 싶어도 그쳐야 할 음식이 있다. 세계 3대 진미음식인 트러플(송로버섯) 캐비어(철갑상어 알) 푸아그라(거위 간)를 배부르게 먹지 않듯 복어 회도 그렇다. 복어 회에 이어 나오는 '복 지리'라 부르는 복어 백탕 맛이 오히려 일품이다.

사람은 너무 불행하거나 지나치게 행복하면 순간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날도 그랬다. 나는 술 한 잔에 복어 회 몇 점이 너무 과분하여 하마터면 "아저씨 생복 피 서너 방울만 주세요" 하고 소리 지를 뻔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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