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오늘은 떡밥 됐심더." "눈금 다 있는데 와 그걸 딱딱 못 맞추노? 가만 있어봐라. 엄마 바꿔주꾸마."
최근에 아버지와 나눈 대화입니다. 내용만 놓고 본다면 저는 여태 밥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요즘 'ㅋㅋ'자가 들어가는 압력 밥솥과 씨름하느라 이 모양입니다. 저는 원래 심각한 기계치인데다 기계를 새로 장만하면 사용 설명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기계와는 태생적으로 궁합이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결혼하고 밥솥 때문에 줄곧 친정 엄마와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아는 동생이 결혼 선물로 뭘 해줄까 하고 묻기에 기능이 제일 간단한 밥솥을 사달라고 했습니다. 취사와 보온 기능만 있는 작은 밥솥. 1년 내내 밥솥 바꾸라는 잔소리에도 선물한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고장날 때까지 쓸 거라며 고집을 부렸지요. 밥솥에 따라 밥맛이 달라진다는 엄마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일반 밥솥 쓴다고 쌀이 뚜껑 열고 달아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러냐고 대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에서 밥을 먹던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밥맛이 참 달고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밥은 왜 이런 맛이 안 날까요?" 며칠 후 집으로 'ㅋㅋ'자가 들어가는 최신형 압력밥솥이 배달되어 왔습니다. 아버지가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한눈에도 무척 비싸보여 아버지 돈을 쓰게 만든 남편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시골집에 전화를 걸어 뭣 하러 돈 쓰셨냐고 했더니 "니 시집 갈 때 뭐 하나 변변하게 못 해줘서 밥솥 하나 사서 보냈다. 밥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묵고 댕겨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부랴부랴 전화를 끊고 말았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일찍 찾아온 퇴행성 관절염 때문에 심하게 절룩거리는 아버지의 걸음걸이. 막걸리 한잔 하신 날이면 기울기가 더욱 심해지는 위태로운 몸, 농기계 수리비 겨우 몇천원 받는 일도 마다 않고 비탈길로, 논두렁으로 향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슬프게 바라보는 게 일상이었지요.
아버지는 시골에서 30년 넘게 농기계를 수리하며 자식들 대학공부를 시켰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기술자입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자식인 저는 아버지의 기술을 인정합니다. 농민들의 기계 고쳐주는 일 하면서 사시겠다며 공무원 생활 접고 고향으로 갔을 때의 일을 저는 기억도 못 하지만 엄마 속은 문드러지다 못해 삭아버렸을 것입니다. "그게 내 팔자인가 보다" 하며 엄마가 체념하게 되기까지 당신들 사이에서는 무수히 많은 싸움이 있었지요. 그 싸움이 안타까웠고 때로는 무서웠습니다.
운동회가 열리는 날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도대체 아버지들 달리기를 왜 집어넣는 거야?' 학교를 탓했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달리셨습니다. 신체적 약점에도 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거북이처럼 말입니다. 아버지는 위대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어른을 대상으로 문학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김현승님의 시를 활용하는데,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참가자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중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 모습은 대부분 비슷한 듯합니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용접일을 한 날은 아버지께서 유일하게 울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밤새 눈이 아파 뒤척이며 안약으로 눈의 통증을 달랬지만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만큼은 아버지도 어쩌지 못하셨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단 한순간도 약해질 수 없었던 아버지. 목 놓아 울고 싶은 날이 왜 없었겠습니까? 어쩌면 서글프고 외롭고 고단해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날, 가족들로부터 위로받지 못한 날에 아버지는 용접봉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아버지의 밥솥이 말을 하네요. "백미, 'ㅋㅋ'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고놈 참 신기합니다. 또 시골집으로 전화를 합니다. "아부지! 밥솥이 말을 합니더!" 다가오는 어버이날에 저는 아버지께 무슨 선물을 해 드릴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
김은아(영남대 유아교육과 겸임교수·마음문학치료연구소장 happymind100@korea.com)






























댓글 많은 뉴스
"참 말이 기시네" "저보다 아는게 없네"…李질책에 진땀뺀 인국공 사장
[인터뷰]'비비고 신화' 이끌던 최은석 의원, 국회로 간 CEO 눈에 보인 정치는?
장동혁 '만사혁통' 카페 가입시 사상검증? "평소 한동훈 부르는 호칭은?"
나경원 "李 집착한 책갈피 달러 밀반출, 쌍방울 대북송금 수법"
김어준 방송서 봤던 그 교수…오사카 총영사에 이영채 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