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때, 나는 진원지에 가까운 센다이시에 있었다. 나는 집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지진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흔들림이 있어도 곧 진정될 것으로 생각하고 태연하게 책상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진의 충격으로 나는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전등이 꺼지고, 땅 울림 소리와 함께 유리 마찰음과 같은 기분 나쁜 고주파음이 울렸다. 겨우 일어나 흔들리고 있는 화장대를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책장의 책이 쏟아지고, 찬장에서 식기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혼돈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흐르고 있었다.
큰 흔들림이 있은 후에도 작은 여진이 계속되었다. 점점 하늘이 어두워졌다. 밤이 되기 전에 방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에 황급히 서둘렀다. 그런데 방안이 갑자기 밝아진 듯했다. 바깥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지독한 추위가 엉망이 된 시가지와 인간에게 엄습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진해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나는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그 후 놀라울 정도로 물자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TV 뉴스를 통해 그 이유를 알고,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도쿄를 중심으로 사재기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전력 공급 제한과 여진 공포 때문에 수도권에서는 사재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호물자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이재민들을 배반하는 행위였다. 집단적 패닉 상태와 같은 이번 사재기의 군중심리는 1970년대의 오일 쇼크를 방불케 했다. 그때는 공급이 달렸던 원유와는 관계없는 화장실 휴지가 사재기의 대상이 되었다. 유비무환의 준비성이 많은 일본인은 물자 부족에는 매우 약하고 민감하다.
며칠 지나 집에 겨우 전기와 가스가 들어왔으나 수도는 여전히 끊긴 상태였다. 공원의 화장실 물로 양치와 세수를 했다. 내 인생에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대피소에 가도 음식이 없었다. 한참 동안 줄을 서서 겨우 들어간 편의점에도 식료품은 없었다. 불안이 날로 커지는 가운데 친한 한국인 친구가 걱정스레 찾아왔다. 그가 내민 봉투 안에는 한국의 과자, 약, 빵, 김 등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내일에 대한 불안이 가득한 상황에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챙겨온 친구의 따뜻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울었다. 이것이 한국의 '정'인가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질서를 지키는 일본인의 모습이 해외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으나,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한국인이었다. 혼란과 고통 속에서 서로 힘이 되어 주는 아름다움이 국경의 벽을 넘은 것이다.
나는 한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센다이의 한국 영사관에서 배식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무렵 한국인 상당수가 영사관 버스로 다른 지역으로 탈출을 했기 때문에 영사관은 조용했다. 밥이 다 떨어지자, 영사관 직원은 "미안합니다. 저녁에는 따뜻한 밥을 많이 만들어 놓을게요"라며 냄비의 누룽지를 긁어 접시에 담아 주었다. 누룽지는 영원히 잊지 못할 정도로 맛있었다. 친구가 아기 기저귀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살며시 기저귀를 건네주기도 했다. 한국인, 재일교포, 일본인 등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해주는 한국 영사관의 깊은 배려가 지진의 불안과 고독 속에서 나를 구해 주었다.
지금 피해자들은 집에 있는 식량을 가지고 나와 다른 이재민을 돕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구조대가 파견되고, 성금과 구호물자가 속속 도착하고 있다. 이런 커다란 친절함이 일본인의 깊은 슬픔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다. 자연은 인간의 오만함을 응징하듯 시련을 주고 있으나, 그 속에서도 우리 인간에게 희망의 빛이 남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도호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반가운 원고입니다. 센다이의 도호쿠대학에 재학 중인 유카 씨는 대지진 때 연락이 끊겨 지인들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이 칼럼의 지난달 원고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는 현재 부모님 집이 있는 고베에서 지내고 있으며 이달 말쯤 센다이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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