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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광장] 브레이크 없는 무한질주,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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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월 15일 새벽, 15살 소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줄곧 1등을 달리다가 2등으로 처진 것이 이유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데도 공부만을 요구하는 이 삶에 환멸을 느낀다"는 유서를 남겼다. 공부 잘하는 소녀의 죽음은 온 나라를 충격 속에 빠지게 했다. 그제야 한 해에 또래 청소년 110여 명이 자살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흘에 1명꼴로 죽어나간 것이다.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썩을 대로 썩은 교육에 사회는 경악했다. 참교육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녀가 남긴 유서를 주제로 발간된 책과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울었다.

최근 학생 4명과 교수 1명이 잇달아 자살한 카이스트로 온 나라가 다시 떠들썩하다. 그런데 충격의 질감이 많이 다르다. 소녀의 죽음은 경쟁과 입시 위주 교육에 대한 사회적 반성으로 이어졌지만 이번은 서남표 총장식 개혁에 대해서만 시시비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죽음은 견고한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결과이자 오직 1등만 기억하는 경쟁 만능 체제에 대한 처절한 저항이다. 사실 이런 죽음의 행렬은 쭉 있어 왔다. 2009년 한 해 동안 202명의 청소년과 268명의 대학생이 자살한 것이다. 특히 작년 1월 삼성 부사장의 자살은 곱씹어 볼 일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미국 스탠퍼드대를 졸업했고, 일본 엔티티(NTT) 근무 중에 삼성으로 스카우트돼 최연소 임원, '삼성 펠로우' 선정 등으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랬던 그가 좌천성 인사 발령이 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등의 반열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그에게 1등 아닌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 역시 카이스트 출신이었다. 학점과 자본을 동일시한 카이스트, 이들의 죽음은 경쟁에서 패배한 자에게 자본이 주는 응분의 대가일 뿐이다.

행복이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70, 80%는 돈이 곧 행복이라 믿는다. 이때 돈은 많을수록 좋다. 많이 벌려면 일류 직장을 다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류 대학을 나와야 하고, 또 학창 시절에 죽으라 공부해야 한다. 오직 하나의 사다리를 놓고 서로 높이 오르려는 혈전을 불사해야 한다. 또 자본은 내일이 오면 행복할 것이라 한다. 내일은 항상 내일이다. 영원히 오지 않는다. 그 내일을 위해 오늘은 죽으라 공부하고, 일하고, 참고, 견디라 한다. 자본이 노리는 함정이다. 루마니아 언론에서 역대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 3위라고 소개한 김웅용 씨의 삶을 자본은 실패한 천재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남들이 살면서 천천히 배우는 것을 조금 어린 나이에 익힌 것일 뿐이다. 빨리 익혔다고 멀리 가는 것은 아니지 않나. 또 박태환이 잘하는 게 있고 김연아가 잘하는 게 따로 있듯이 모든 분야에서 특출할 수는 없다. 난 남들이 나이 들어 갈 곳을 미리 가서 경험했을 뿐이다. 한때는 그게 너무 재미있었지만, 나중에 힘에 부치면서 잘못된 선택이란 생각이 들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일 뿐이다." 그가 선택한 것은 경쟁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25년 전 어린 소녀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부르짖었지만, 요즈음 아이들은 '나를 제발 냅 두세요'라고 소리친다. 한 모임에서 청소년과 대화 중에 "지금 무엇을 하고 싶니?"라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놀고 싶어요, 쉬고 싶어요, 힘들어요"라고 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사회, 오직 경쟁에서 이기라고 부추기는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작가 박범신은 '인류는 지금 자본과의 3차 세계대전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또 시인 유하는 '나를 이끌었던 상상력의 바퀴들아 멈추어라 그리고 보이는 모든 길에서 이륙하라"고 하며, "길만이 길이 아니다 꽃은 향기로 나비의 길을 만들고 계절은 바람과 태양과 눈보라로 철새의 길을 만든다"고 읊었다. 자본의 길만이 길이 아니다. 자본의 무한 질주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자본과의 3차 세계대전에 우리 스스로를 징집시키자. 나로부터의 교육 혁명만이 아이들을 죽임의 교육에서 삶의 길로 진정 인도해 낼 수 있다.

문창식(간디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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