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결하세요." 술자리 같은 곳에서 지인들이 가끔 농담처럼 던지는 질문에 난감할 때가 있다. 쉰의 나이에 혼자 사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거나 측은지심이려니 하고 답을 찾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것은 소위 해결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무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에 대한 인식이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한 젊은 처녀가 매춘에 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너무나도 당연히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매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었지만 댓글의 대부분은 매춘이 사회적 악으로 규정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반응이었다. 평소 자신의 진보적인 글에 성원을 보냈던 사람들이 매춘의 사회적 공익(?)을 강조하거나 매춘 여성들의 존재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털어놓았고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그나마 일부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는지 글을 올린 처녀는 더 이상 글을 달지 않았다. 어쩌면 지인들이나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들의 성욕은 주체할 수 없는 것이고 해결(?)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모른다. 해서 매춘은 막아서는 안 되며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매춘 여성들의 존재가 문제라는 식으로 오히려 매춘을 하는 이들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진보적인 여성임을 자처하는 한 여자 후배조차도 술자리에서 접대를 하는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여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가진 성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섹스는 배설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그 배설의 욕망을 당연시한다면 인간의 존재 가치는 일고의 여지조차 없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나눌 때이며 그 사랑은 결코 배설의 욕망이 아님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 어느 누가 사랑하지 않는 이와의 섹스를 즐거워한다는 말인가? 성범죄자들에게는 분노하면서 돈으로 성을 사고파는 행위에 분노하지 않는 사회에 정의가 있을 수 있을까? 젊은 날 성적 욕망으로도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여자를 범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사랑했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이 그 어떤 변명도 될 수 없었기에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지금껏 가지고 있다. 히말라야의 오지 마을에 붙어 있던 매춘 금지 포스터는 천박한 자본주의가 낳은 인간 멸시라는 것을, 결국 성은 해결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서로가 가꾸어야 할 아름다움임을 이제야 깨달았다면 이 생명의 봄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전태흥(미래티엔씨 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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