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가기 전 놀이터가 없는 산동네 아이들은 오전 내내 대부분 시간을 산에서 논다. 노는 것도 아이들 놀이라기보단 산에서 유격 훈련하는 꼬마 특공대 모습이다. 내가 살던 산동네를 내려오면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있고 대학교 담장은 철조망과 철사로 만든 가시덤불로 되어 있어 지금의 비무장지대 철조망, 딱 그 모양이다. 오후 3, 4시가 되면 대학교 운동장이 한산해지는 것과 동시에 산동네 꼬마 특공대는 길이 잘난 철조망 루트로 넘어가 대학교 운동장을 접수한다. 그러다 일몰 시간이 다가오면 순찰 도는 경비아저씨가 호각을 불며 꼬마 특공대를 쫓아낸다. 특공대 중에 발 빠르기로 유명한 나는 거의 일착으로 철조망을 넘어 탈출한다. 그런데 가끔 담 타는 게 익숙지 못한 아이는 자기 키의 4, 5배 되는 철조망 가시덤불에 걸려 상처가 나고 울기도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때 달려오는 경비아저씨는 혹시라도 아이가 떨어질까 봐 "천천히 내려가! 조심해!" 소리를 지르시지만 아이에게 그 소리는 자기를 걱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호통치는 고함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당시엔 왜 그리 경비아저씨의 호각소리와 제복이 무서웠을까? 그 시대의 정서를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아이들 스스로 몸으로 느끼고 그렇게 자랐었나 보다. 그래도 대학교 경비아저씨는 우리를 쫓아내는 게 목적이지 우리를 꼭 붙잡아야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을 베테랑 꼬마 특공대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 많은 나는 우리 특공대원들을 모아놓고 혜화동에 위치한 혜화유치원을 접수하자고 제안한다. 당시 유치원은 상위 5% 가정만 다녔을 때다. 어쩜 0.5%일 수도 있다. 정예요원 3명만 혜화유치원으로 향한다. 대학 철조망처럼 높진 않았으나 담이 벽돌담이라 넘기가 녹록하지는 않았다. 담 너머로 살짝 보이는 아무도 없는 유치원 운동장의 놀이터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난 제일 먼저 담을 넘어 진입한다. 나머지 둘도 무사히 진입, 조용히 들어가 주위를 살피고 놀이시설을 조심스레 하나둘씩 타보며 맘껏 즐긴다. 겁이 많아 같이 안 온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니 더 신나고 더 즐겁다. 얼마나 지났을까? 벌써 어둠이 운동장에 내린다. 정신없이 놀고 있는데 시야에 경비로 보이는 아저씨 두 명이 잰걸음으로 뛰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치사하게 호각도 불지 않고, 도망치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냅다 달려 담벼락에 일착으로 올라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 땅바닥에 패대기를 친다. 대학교 경비아저씨와는 완전 다르다. 우리 세 명을 무릎 꿇리고 경비아저씨는 머리를 쥐어박으며 거친 말투로 우리를 혼을 낸다. 얼마 전 담 넘어 들어와 물건을 훔쳐간 게 우리들이라고, 차림새나 산동네 사는 거로 봐서 그럴 수 있다는 거다. 우리는 단순히 놀고 싶어 왔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다. 한 친구가 급기야 울먹거리며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놀러 오겠습니다"라며 소리 내서 우는 게 아닌가? 다시는 안 놀러 오겠다고 하는 친구의 서러운 울음에 나와 나머지 친구마저 같이 울었다. 그 자리는 그렇게 정리가 됐던 것 같다.
지금은 어디를 가도 놀이시설이 여유롭게 자리하고 있다. 예전 내가 겪은 이런 사연은 이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있고, 특히 부모의 잘못된 판단으로 버림받거나 내팽개쳐진 불행한 처지의 아이들도 여전히 많을 것이다.
5월 어린이날을 맞아 주변을 둘러봐야 할 것 같아 예전 나의 유년기를 잠시 떠올려 봤다. 언제나 그렇듯 다가오는 5월에도 여기저기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겠지. 하지만 어디에도 참여할 수 없는 소외된 어린이들에게는 어린이를 위한 5월이 오히려 가장 슬프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도 4월 30일부터 시작하는 어린이 전문 예술축제를 위해 세계 최고의 그림책(동화) 작가 앤서니 브라운 원화 전시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 교육과 체험행사 등 어린이 천국을 만들기 위한 다채로운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돈이 없어도 광장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어려운 어린이를 배려한 무료 프로그램도 더 다양하고 풍성하게 준비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특별히 형편이 어려운 상황 때문에 마음 다치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펴보고 마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안 형편과 관계없이 모든 아이들이 행복한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조재현(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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