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波瀾萬丈). 파도의 물결 치는 것이 만장(萬丈)의 길이나 된다는 뜻이다. 사연 많은 인생을 빗대 쓰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는 남 부러울 게 없을 정도의 성공을 거뒀지만 서석홍(68)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에게도 삶의 고비는 끊이지 않았다.
첫 번째 시련은 일찍 찾아왔다. 다섯 살 때 선친이 돌아가시면서 코흘리개는 농사꾼이 돼야 했다. 가야산 줄기인 마을 뒷산에서 해가 지도록 소를 몰고, 쇠뿔도 녹일 듯한 여름 땡볕에도 어김없이 일을 해야 했다.
"어릴 때 공부는 곧잘 했어요. 가난한 수재들이 많이 진학하던 대구사범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간 뒤 30리 길을 매일 걸어서 통학하면서 성적이 점점 내려가더군요. 결국 고교 진학 대신 양복점, 약국 점원으로 취직했습니다.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지요."
생업 현장에서 3년을 보내면서도 학업의 뜻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뒤늦게 학교로 돌아왔다. 당시 실업계 고교의 경우 특례입학이 가능했던 터라 1학년은 건너뛰고 2학년 2학기에 편입했다. 1년 남짓 공부에 매달린 결과 영남대의 전신인 청구대학 섬유공학과에도 입학했다.
하지만 낭만은 없었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주경야독을 해야 하는 처지는 그대로였다. "대구 시내 한 섬유회사에 다녔는데 주야간 3교대였어요. 휴학을 거듭하면서 6년 만에 겨우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산업체 근무 경험 덕분에 서울에 있던 큰 섬유회사에 지방대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잡초 같은 끈질긴 생명력을 일찌감치 터득했던 터라 사회생활은 일사천리로 풀리는 듯했다. 노모를 모시고 살면서도 업무에 최선을 다한 결과 과장'부장'이사'공장장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무리한 투자 탓에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됐고, 그의 직장생활은 5년 만에 끝이 났다. 두 번째 위기였다.
"곰처럼 우직하게 일한 기억밖에 없다"는 그답게 도전은 계속됐다. 1973년 자신의 첫 회사를 설립했다. 지퍼용 모노필라멘트의 국산화에 처음 성공한 '동선모노'의 시작이었다. 몇 년 뒤에는 동선합섬도 창업, 승승장구했다. 그는 1987년 포리프로필렌섬유업계 최초의 수출 500만불 탑, 1988년 1천만불 탑에 이어 1989년에는 2천만불 탑과 대통령 표창, 2003년엔 은탑 산업훈장을 수상한 바 있다.
국내시장을 석권하고 해외시장에서도 호평을 받으면서 한때 일류 대기업을 꿈꾸기도 했지만 위기는 또다시 찾아왔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였다. 값싼 노동력을 앞세운 중국이 세계시장에 등장하면서 매출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졌다. 은행 빚을 내어서 부천'용인'신갈'평택에 잇따라 세웠던 공장은 애물단지가 됐다.
"자금 압박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깔고 잔 이불이 땀범벅이 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지요. 은행 돈 무서운 줄 그때 알았습니다. 결국 서울 사옥과 공장들을 석달 만에 후다닥 헐값에 처분하니까 좀 여유가 생기더군요. 일찍 구조조정을 했던 터라 외환위기는 상대적으로 쉽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고생의 끝은 아니었다. 창업 때부터 함께했던 직원들이 회사를 그만둔 뒤 똑같은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차린 것이다. "배신감이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요. 수십 년을 동고동락했던 부하직원이 회사 거래선까지 다 챙겨서 나가는 바람에 문닫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저도 의욕을 잃고 사업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끝내 오기로 버텼습니다. 결국 환갑의 나이에 첨단제품 개발에 또다시 도전해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1999년부터 한국포리프로필렌섬유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후배들을 위한 지원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모교인 백산초교'고령중'영남대에 매년 수천만원 이상의 장학금을 보내고, 재경 영남대 총동창회 회장'고령군 향우회 회장을 맡아 지역 발전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고향 주민들도 그의 뜨거운 고향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공적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는 올해 '자랑스러운 영대인'상을 받았다.
"편안하게만 사는 것은 인생의 참맛을 모르고 사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제조업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젊은이들이 안정된 직장이라는 이유로 대기업만 가려는 자세도 잘못 됐다고 봅니다. 중소기업에서 다양한 분야를 배우면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도 훨씬 쉽거든요. 저는 지금도 서울사무소는 아들에게 맡겨둔 채 공장에서 일합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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