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정물화

미술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물이나 생명이 없는 물체를 그린 것을 정물화(靜物畵)라고 합니다. 탁자나 꽃, 사과 등 일반적인 사물을 그린 것입니다. 정물화의 용어는 18세기 네덜란드의 미술사학자 후브라켄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16세기나 17세기에도 정물화 장르의 그림이 그려졌는데 18세기에 비로소 독립된 형태의 정물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신화나 사람이 아닌 일상의 사물을 모델로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소재가 그림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쉽게 납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단순한 소재들이 물건 이상의 상징성을 띠게 됩니다. 꽃만 보더라도 꽃의 화사함과 색채는 감동적이지만 그 꽃의 시듦을 그렸다면 삶의 허무나 인생의 끝자락이라는 의미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림에 레몬이 있다면 이것은 절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포도주의 풍미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레몬즙을 넣는데 그 용량이 정확히 맞아야 맛을 내기 때문에 그 정확함을 '절제의 미덕'에 비교한 것입니다.

딸기는 특히 기독교적인 상징으로 딸기 잎의 세 부분은 삼위일체(성부'성자'성령)를 나타내며 다섯 개로 이루어진 꽃잎은 십자가에서 입은 예수님의 여섯 군데의 상처를 의미하고 낮은 곳에 서식하는 딸기의 특성은 겸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정물화 속의 모델이 본래의 기능을 넘어서 또 다른 상징의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정물화는 단순한 사물의 표현에서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상징하는 은유의 의미를 담게 됩니다.

고요하다는 것은 '움직임이나 흔들림 없이 잔잔한 것을 말합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동작이나 마음 ,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지금 자리에서 흔들림 없는 지금을 말합니다. '고요'를 '죽음'과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든가, 명상 중에 고요함을 지속하라고 말할 때 죽음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저 평안하고 조용한 흔들림 없는 상태일 뿐입니다.

정물화를 영어로는 '정지한 생명'(still life) 프랑스어로는 '나뛰르 모르트'(nature morte)라 합니다. 영어의 뜻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생명이고 프랑스어는 '죽은 자연' 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정물화'의 단어를 우리는 고요함을 뜻하는 한자 정(靜)을 사용해서 정물화라는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생명'은 '죽은 자연'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과 그것은 '고요할 뿐' 이라는 동양의 관점이 흥미롭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라는 서양적 시각을 봅니다. 정지와 움직임, 살아있음과 대비되는 죽음이라는 대구 없이 그저 고요한 사물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생각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동양적 사고를 보여줍니다. 세상 모두를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이용하고 나눔으로써 파생된 많은 문제에서 가치판단을 미루고 그대로 보려는 노력은 필요한 사고입니다. 살아있음과 죽음의 판단을 인간만이 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은 오만입니다. 그것의 생명 가치와 존재 이유는 인간판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증거를 반드시 시끄럽고 움직이며 무엇인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찾을 이유는 없습니다. 고요함도 생명의 활동이며 말없는 침묵도 살아있음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세속에서 말하는 죽음을 원적(圓寂)이나 적정(寂靜)이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두 단어 모두 '고요'함이라는 공통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 쓰인 정(靜)은 분주하고 소란스럽다는 상대적 의미보다는 고요함과 평화로움 속에서 결코 멸하지 않는 것이 생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활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똑같이 생명체로서의 존엄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리없이 낮은 곳에 뿌리를 내린 생명이나 커다랗게 뻗은 거목이나 모두 그 생명의 무겁고 가벼움에서는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요함 속에 깃든 생명의 움직임, 그것을 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타(불국사 주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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