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행복칼럼] 숙환

숙환(宿患)

세상에 가장 무서운 병은 '숙환'이다. 세상에 암이 아무리 죽는 병이라고 해도 항암제를 쓰거나 수술을 하면 잘 낫고, 또 잘못돼도 한동안 기능을 하다 죽는다. 그러나 숙환, 이 병에 걸리면 백이면 백 다 죽는다. 나는 의사이지만 의학책에서도 이 병의 이름을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이 병은 의학책에는 없어도 언론에는 엄연히 존재한다. 이 병의 특징은 100% 죽는 것이지만 그 병에 걸리는 사람은 항상 우리나라 사람이며 그들은 대개 벼슬이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인 것도 특징이다.

며칠 전 신문에 유명인사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났다. '개 같은 오후'라는 책을 쓴 시드니 루멧이 87세로 죽었는데 사인은 림프종이라고 했다. 같은 면에 또 하나의 기사를 옮겨보자. 전 경제기획원 차관하던 어떤 분인데 모월 10일 오전 2시33분에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돼 있다. 시간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만 병명은 나와 있지 않다. 외국의 유명인사는 죽었을 때 반드시 죽게 된 병명이 소개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부 숙환이라고만 말한다. 간혹은 지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론에서 유명인들의 죽음을 보도하는 이유는 물론 흥미를 충족시키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인간의 외모나 조건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차이가 날 수 있어도 그 본질적인 면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돈이나 명예에서는 인간끼리 차이를 두셨지만 생로병사에서는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셨다는 깊은 뜻을 실감하게 되면 '갖는다'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문을 읽다 보면 부자와 고관대작은 죽지 않고 날개가 달려 마치 하늘로 우화등선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유명인들의 죽음을 숙환 때문이라고 보도함으로써 그들은 병으로 죽지 않고 서민들과는 또 다른 고상한 이유로 세상을 뜬 것처럼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는 말이다. 똑 같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누구는 선종이고 열반이며 서거이고 입적이며 누구는 죽었다거나 사망이라고만 표현되는 언론의 용어 선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다 똑 같은 존재다. 다만 그들이 입은 옷 모양에 따라 호칭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이 이승을 떠났을 때는 그 사람의 생전의 높낮이 관계없이 그 경위와 사건을 표현해 주는 것이 시민들이 알 권리를 충족시키는 진정한 민주 언론일 것이다. 앞으로 정 죽은 사람의 병명을 숨겨 주고 싶다면 그 죽은 사실마저도 숨겨 주길 바란다.

권영재 대구의료원 신경정신과 과장·서구정신보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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