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안 했지만 시댁은 있어요. 바로 대구예요."
1936년에 영국 명문가에서 태어난 여성이 대구 품에 안겼다. 그냥 안긴 것이 아니고 푹 파묻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그 품은 신천변 대백프라자 길 건너편 강변타운이다. 영국인이지만 대구를 위해 일한 당당한 대구의 명예시민이다. 올해 2월 25일자로 대구시로부터 시민증을 수여받았다. 47년 전 명예시민증 제도가 도입된 이래 모두 39명의 외국인이 이 명예시민이 됐다.
수잔나 메리 영거(Suzanna Marry Younger·75) 여사는 충분히 그럴 만하다. 아니 앞에 '명예'라는 말은 빼도 좋을 것 같았다. 대구 사람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고 있고, 분명한 운명처럼 한국과 인연이 맺어져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여기에다 구수한 사투리는 얼마나 정겨운지, 한마디로 처음 만나는 한국인들은 시쳇말로 뻑갈 정도다. 인터뷰 섭외 때부터 첫 만남에서 나온 멘트까지. "명예시민 됐다고 벌써 신문에 나갔는데, 뭐 할라꼬 또 하노? 할 게 없을낀데…." "어서 오이소~, 커피 벌써 다 됐을끼다. 늦게 오는 사진기자는 재탕할 수밖에 없는기라."
구수한 언변에 평화로운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 수산나 여사와의 인터뷰는 5월 5일 어린이날 오후 1시 30분부터 오후 3시 10분까지 100분 동안 강변타운 자택에서 이뤄졌다. 라이프 스토리텔링을 하기 위해서는 그 시간도 사실 짧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압축 또 압축해 정리해봤다. 수학적으로 보면 수산나 여사는 대구시민이 되기에 충분조건이 됐고, 대구시 입장에선 수산나 여사가 선진복지를 달성하고, 문화의식을 올리는 데 필요조건이다. 대구시와 필요충분조건 관계인 그를 한 인기 TV프로그램의 무릎팍도사(강호동)처럼 이번 인터뷰를 통해 좀 파헤쳐보자. '팍! 팍!'
◆정치 명문가 집안의 맏딸, 신앙에 홀릭(Holic) 대구행
'할아버지-영국 보수당 핵심 간부, 아버지-노동당 국회의원 및 외무부 차관, 수산나-옥스퍼드대 출신, 남동생-BBC 월드 서비스 라디오 담당'.
수산나 여사의 집안 내력은 학벌이나 집안 내력을 중시하는 한국적인 문화에서 볼 때,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였다. 할아버지 집을 보여줬는데 대저택이었다. 그런 집안의 딸이 대구로 왔을 때는 뭔가 보통 인연은 아닌 듯했다. 'Why'라는 질문을 던지자, '대구대교구장이었던 서정길 대주교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당시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남북한 모두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데다 그 속에서 믿음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돌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여평신도 4명과 함께 사회복지 및 신앙전파를 하려던 서 대주교와 함께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도 감히 지구촌 반대편 작은 나라로 가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자 수산나 여사는 아버지에게 얘기를 했다. "젊었을 때, '인간은 모두 똑같다'며 마르크스주의에 빠져든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달리 노동당에서 정치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맏딸인 저에게 사람은 다 똑같다고 가르쳤습니다. 옥스퍼드대 3학년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져든 저는 그 두 가지 정신을 갖고 대구행을 택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고개를 저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한국에서 청춘을 바쳐야 하는데….' 수산나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살았고, 지금도 하나님 안에서 너무 행복합니다. 하고픈 일들 많이 했고, 말년에 시댁인 대구에서 사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또 한 가지 사실에 더 놀랐다. 수산나 여사의 집안에는 한국전쟁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용사가 3명이나 있었다. 한국말로 설명했다. 큰집의 사촌오빠 둘과 외가 쪽 어머니의 남동생이 한국전에 왔다갔다는 것. 이에 더해 아버지도 외무부 차관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은 의심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필연적 우연 or 우연적 필연' 뭐든 운명처럼 수산나 여사가 대구로 온 것이 맞다.
◆인생 역정, 청년·노년은 한국 vs 중년·장년은 프랑스
수산나 여사가 인생 행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며 삶을 택하는 순간부터 현재 한국나이로 75세까지의 행로를 보면 크게 청년과 노년은 한국 대구에서, 중년과 장년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 1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활동한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옥스퍼드대 현대철학·정치·경제를 공부하다 졸업 무렵 성경에 심취해 로마-아테네-예루살렘으로 여행을 갔다온 뒤,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는 선택의 어려움이 없었다. 마침 한국의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가 한국에 가서 복음과 복지를 전할 영국인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수산나는 청년시절을 대구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던 가출 여성(성매매 여성), 하층민(구두닦이, 부랑자, 고아 등)을 도우며 보냈다. 생애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사람은 다 똑같다'는 생각으로 대했던 것이 하나님의 기적처럼 큰 보람으로 다가왔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리고 중'장년 때는 전 세계를 돌며 봉사하다 7년 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시댁으로 여기고 있는 대구로 와서 살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올해는 뜻 깊게도 대구 명예시민이 됐다. 청년시절에 활동했던 가톨릭푸름터에서 지금도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장년 시절은 짧게 설명하면, 1973년 프랑스 루르드 옥실리움(Auxilium) 문화양성센터에서 교육을 맡으면서,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인도, 아시아 국가 등을 방문해 사회복지와 관련된 봉사활동을 했다. 이 시기는 한 세대에 해당하는 딱 30년이었다. 30년 동안에도 2, 3년에 한 번씩 대구를 찾았다. 그리고 이후 대구 품에 푹 안겼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그의 평화롭고 온화한 미소, 좋은 혈색을 보며 건강비결에 대해 물어보자, "전 건강한 사람 아니에요. 당뇨를 20년 동안 달고 살고 있으며, 장티푸스, 황달, 신장염, 심장병 등 모든 신체가 병을 앓았습니다. 하지만 전 항상 생기가 있고, 남다른 회복력이 있는 것 같아요. 하느님이 주신 이런 건강에도 행복하고 감사해하죠"라고 답했다.
교회일치운동에 대해서도 한 말씀 던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단하신 사랑 안에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포용하는 마음 필요하고요." 수산나 여사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 아래에는 동네 병원에서 수술받다 돌아가신 아버지 케네스 영거(Kenneth Younger)가 주신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대구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돼야 할 인물, '수산나 메리 영거'.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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