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모야모야병 엄마' 돌보는 김수진 씨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야 엄마를 알았다"

정제자(46) 씨는 아들 김수진(24) 씨가 왼손에 쥐여준 주황색 공을 내내 놓지 않았다. 뇌출혈로 쓰러져 특수 뇌혈관 질환인 모야모야병 진단까지 받은 정 씨는 언제쯤 병상에서 일어나 자신의 손에 쥔 공처럼 아들을 꼭 안아줄 수 있을까.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정제자(46) 씨는 아들 김수진(24) 씨가 왼손에 쥐여준 주황색 공을 내내 놓지 않았다. 뇌출혈로 쓰러져 특수 뇌혈관 질환인 모야모야병 진단까지 받은 정 씨는 언제쯤 병상에서 일어나 자신의 손에 쥔 공처럼 아들을 꼭 안아줄 수 있을까.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9일 오후 대구의 한 병원. 김수진(24) 씨는 어머니 정제자(46) 씨의 기저귀를 갈았다. 냄새가 났지만 덤덤하게 해냈다. 이제 그의 일상이 된 일이다. 든든한 나무 같았던 엄마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처럼 됐다. 지난해 4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내내 침대에 누워 지낸다. 중환자실에서 눈만 깜박이고 있던 정 씨는 이제는 "예" "안녕하세요" 하고 대답도 한다. 정 씨가 쓰러진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아들이었는지 김 씨는 하루하루 깨달아가는 중이다.

◆"엄마는 엄마니까"

엄마는 항상 우리가 먼저였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와 이혼을 결정할 때도 나와 여동생 혜진이(16)의 의견을 물었다. 술만 먹으면 난폭해지는 아버지의 폭력 앞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면서도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해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레 내게 물어왔다. "이혼해, 엄마. 그래도 난 엄마랑 살 거야."

그제야 비로소 엄마는 아버지와 남이 됐다. 만약 그때 우리가 안 된다고 했다면 엄마는 이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었다. 엄마는 항상 바빴다. 섬유공장에서 섬유 짜는 일을 했던 엄마는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왔다. 그땐 밤늦게 일하는 게 우리 남매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엄마는 엄마니까,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고, 우리를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엄마는 우리가 소풍 가는 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직접 김밥을 말았다. "에이, 요즘 김밥집 많잖아. 그냥 사먹으면 된다니까." 그래도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매년 네 번씩 김밥을 만들었다. 그것이 엄마의 사랑인지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엄마의 두통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엄마는 편지를 썼다. 편지의 끝은 항상 '아들아 사랑한다'고 끝났지만 편지 내용 대부분은 엄마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일상을 늘어놓은 것들이었다. 전화로 해도 될 소소한 일상을 엄마는 글로 풀어냈다. 그리고 하루는 편지에 '공장을 그만두고 외삼촌네 고깃집에서 일하게 됐다'고 적었다. 편지에는 10년 넘게 다닌 공장을 그만둔 이유를 적지 않았다. 2009년 제대하던 날, 군복을 입고 고깃집에 갔을 때 엄마는 나를 꼭 안아주더니 말없이 삼겹살을 구웠다. 오랫동안 공장에서 일하며 엄마의 체력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추측할 만큼 나는 성숙하지 못했다.

지난해 4월 30일, 엄마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고깃집에서 식당 문을 닫고 식당 동료와 함께 퇴근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했다. 정신없이 찾아간 중환자실 입구에 앉아 엄마가 쓰러지기 며칠 전 한 말이 떠올랐다. "수진아, 눈이 아프다. 침침한 게 앞이 잘 안 보이네." 눈병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다음날 약국에 가서 안약을 사왔다. 눈에 안약을 넣으며 "암만 해도 눈이 이상하다"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것이 엄마 몸이 약해지고 있다는 징조였구나. 서러운 눈물이 흘렀다. 뇌출혈로 쓰러진 엄마에게서 새로운 병이 발견됐다. 병원에서 CT 촬영을 해보니 '모야모야병'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병원에서 모야모야병은 특수한 뇌혈관 질환으로 뇌에 피를 공급하는 양쪽 내경 동맥이 서서히 막히는 질환이라고 했다. 그동안 두통이 심했을 텐데 엄마는 단 한 번도 머리가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항상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엄마의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엄마가 괜찮다고 믿고 싶었던 거다.

◆엄마, 울지마

엄마가 쓰러진 뒤 2년제 전문대 컴퓨터공학과에 휴학계를 냈다. 이제 내가 엄마를 돌볼 차례다. 엄마가 중환자실에서 나왔을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를 목욕시켰다. 어색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엄마가 약해지고 나서야 아들 노릇을 한다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지난해 4월부터 나는 24시간 엄마와 붙어 지낸다. 병원에서 엄마와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운동을 하고, 병원은 이제 엄마와 나의 집이 됐다. 내가 힘이 닿는 데까지 엄마 곁을 지켜야지. 매일 밤 이렇게 다짐한다.

엄마의 병은 기억력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엄마의 기억력은 10분도 지속되지 못했다. 외삼촌과 혜진이가 금방 병실을 다녀갔는데도 "혜진이 안 오냐" "저 사람 누구냐"며 물었다. 그래도 신기하게 엄마는 외할머니는 기억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외삼촌 집에 있는 외할머니가 찾아오면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하며 엄마를 끌어안고 울었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마음은 엄마의 엄마를 기억하고 있나 보다.

지금 우리 가족은 가진 것이 없다. 영구임대아파트 보증금 200만원과 병원비를 내고 남은 보험금 몇백만원이 전부다. 엄마 기저귀와 물티슈를 사는 데만 한 달에 20만원이 넘게 든다. 언제 내가 대학에 복학할 수 있을지, 엄마의 그늘 없이 혜진이와 단둘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할 때도 있다. 외삼촌은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수진아, 니가 이제 가장이다." 이제 내가 엄마가 됐다. "엄마, 울지마. 내가 지켜줄 테니…."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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