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선승 달마, 혜능 대사에 의해 창시된 선종(禪宗)은 도당(渡唐) 유학승들에 의해 신라로 들어와 한국 선불교의 기초가 되었다. 신라 고승 지증 대사는 문경을 둘러보고 산세와 지리에 반해 봉암사를 세웠다. 이후 희양산은 우리나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종찰로 우뚝 섰다. 봉암사는 한국 불교의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킨 곳. 일제강점기 한국 불교는 왜색화로 급속히 타락의 길로 들어선다. 난맥에 빠진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성철, 청암, 자운 등 50여 스님은 희양산에 모여 이른바 '봉암사 결사'를 결행했다. 한국 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지만 구호는 간결했다. '오직 부처님 법대로'.
◆충청과 영남을 연결하는 백두대간의 허리=소백산, 월악산을 뻗어온 백두대간은 문경새재, 조령산, 이화령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다. 다시 남쪽으로 맥을 일으켜 속리산으로 줄기를 이어가기 직전 높이 솟구친 산이 문경 희양산(999m)이다. 충청과 경북을 연결하는 요충지답게 황장, 대미, 조령, 대야, 속리산 등 명산들을 끼고 있다.
희양산은 이런 산세나 지형보다 불교사적인 면에서 더 가치를 발한다. 해방 이후 한국 불교는 600년 동안 이어온 조선왕조의 억불(抑佛)정책의 족쇄와 일제의 '사찰령'으로 대표되는 종교말살 정책의 폐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47년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혁신 운동이었다. 스님들은 제일 먼저 왜풍을 일소하고 수도 도량으로 거듭날 것을 결의했다.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재를 없애고 화려했던 가사(袈裟)도 괴색으로 바뀌었다. 일일부작 일일부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정신을 생활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수행자들이 노동에 지쳐 선방에서 졸기하도 할라치면 '밥값 내놔라 이 도둑놈들아' 하는 성철 스님의 고함소리가 산을 쩌렁쩌렁 울렸다고 한다.
1982년부터 수도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사찰은 물론 일대 임야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다. '금단의 사원' 전통의 시작 이었다. 매년 석가탄신일엔 산문을 열었으나 그것도 경내로 방문이 제한되었다.
현재 문경 쪽에서 오르는 등산로는 대부분 막혀 있고 주등산로는 충북 괴산군 쪽에 집중돼 있다. 희양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일반 등산객들과 백두대간 종주팀 두 부류다. 종주팀들은 버리미기재-은티재-배너미평전 코스를 주로 타고 일반 등산객들은 은티마을-지름티재-구왕봉-희양산으로 올라 희양산성-은티마을로 돌아오는 원점회귀코스를 주로 이용한다.
◆지름티재-정상-산성-은티마을 코스 인기=청량한 바람을 가르며 취재팀은 은티마을로 접어들었다. 등산로 입구엔 입산금지 표지판과 등산로 안내도가 나란히 서있어 등산객들을 당황케한다. 1984년 산문 폐쇄 당시 규정이 아직 정리가 안 돼 이런 시비가 벌어진 것이다.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쾌적한 임도를 따라 20분쯤 걷다 오른쪽 경사로를 만나면 본격 등산이 시작된다. 처음 만나는 지름티재는 지명에서 짐작되듯 연풍과 봉암사를 연결하는 지름길이다. 한때 연풍, 봉암사, 희양산을 연결하는 요지였으나 산문이 막힌 지금은 한적한 산 속 삼거리가 되었다.
지름티재에서 오른쪽 급경사를 치고 오르면 구왕봉(898m). 지증 대사가 절을 세울 때 연못에 살던 아홉 용들이 이 봉우리로 쫓겨 왔다고 해서 이 이름이 유래됐다. 등산로는 보기보다 가파르다. 곳곳에 로프, 직벽에 가까운 절벽을 오르느라 호흡은 팍팍해진다. 40여 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협곡 너머로 희양산의 바위산이 우람한 근육을 드러낸다.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름티재로 내려서야 한다. 다시 한 번 급경사 길과 만나다. 정상 직전 200, 300m 구간은 희양산의 가장 험난한 슬랩구간. 70도 이상의 경사각이 벼랑처럼 이어진다. 겨울철 이곳은 산악부원들의 훈련코스로 많이 이용된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골짜기를 울린다. 30여 분 씨름 끝에 겨우 삼거리봉에 올랐다. 상큼한 솔향과 함께 백두대간의 준령들이 실루엣으로 펼쳐졌다. 봉암용곡 너머로 대야산, 속리산이 서쪽으로 악희봉, 민주지산이 박무(薄霧) 속에서 아득하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봉정암엔 선적(禪的) 기운이=정상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수백 길암벽이 까마득히 펼쳐졌다. 구왕봉에서 보았던 남서쪽 사면이다. 희양산은 대간길에서도 가장 기(氣)가 센 곳. 대간 위치가 신체의 단전(丹田)에 해당하는 데다 봉우리 전체가 에너지가 충만한 바위산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정상 쪽으로 중턱쯤 이르자 남쪽 송림 속에서 수채화 같은 가람이 눈에 들어왔다. 선적(禪的) 기운이 감도는 것이 한눈에도 봉암사임을 알 수 있었다. 암봉을 배경으로 노송과 조화롭게 배치된 가람에서 한국 선맥(禪脈) 산실의 고고한 자태가 느껴진다. 볼 수는 있지만 이를 수는 없는 비밀의 사원, 신비감은 꼬리를 문다.
사찰 주변과 토굴엔 스님들이 화두를 잡고 깨달음에 몰두하고 있다. 어느 산에서든 정숙은 에티켓이지만 특히 희양산에서 만큼은 '음소거 모드'를 유지해야 한다.
정상에서 인증 샷을 찍고 다시 삼거리로 돌아 나온다. 동쪽으로 난 하산 길로 30분쯤 내려서면 희양산성이 나온다. 삼국사기에 '929년 후백제 견훤이 그의 고향 가은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이 과거 후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성터에서 직진하면 시루봉으로 연결된다. 원점회귀를 위해 왼쪽으로 꺾어 은티마을로 다시 접어든다.
계곡의 돌 틈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나뭇가지 사이를 나는 새들 울음소리도 청량하다. 산은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인간의 발길을 막고 간섭을 배제한 인위적 격리 덕이다. 우스갯소리로 희양산을 '한국 불교의 DMZ'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런 격리는 세상의 잡음을 차단해 수도도량으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되었고 생태적으로는 인간의 간섭이 배제돼 다양한 종(種)들의 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생명과 생태와 수도가 공존하는 청정도량, 이런 '아름다운 격리' 전통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교통=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김천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바꿔 탄다. 문경새재IC에서 내려 3번국도를 타고 가다 연풍면에서 34번국도로 옮겨 탄다. 연풍면에서 은티마을 표지판을 보고 진행한다.
◆맛집=▷진남매운탕(054-552-7708) 문경시 신현리, 매운탕 해물탕. ▷초곡관 문경약돌돼지(054-571-2020) 문경시 상초리, 갈비 육류. ▷소문난 식당(054-572-2255) 문경시 하초리, 청초묵조밥.
◆숙박=은티펜션(010-4666-4976)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희양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천일염으로 담근 장류(醬類)도 판매한다.
한상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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