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창립에 대한 대통령(전두환)의 결재가 난 것은 1981년 11월 5일이었다. 그러나 그해 5월 "국민에게 건전한 오락과 화제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프로야구 창설은 논의됐고, 삼성은 그 이전부터 선수단 구성을 위한 물밑작업에 나섰다.
삼성은 1967년 경북고 창단 감독을 맡아 1970년대 경북고 전성시대를 연 대구 야구의 대부로, 고교와 대학 감독을 15년간 역임하며 전국 규모 22개 대회서 연속 우승을 일궈낸 당시 중앙대 서영무 감독(작고)을 원년 감독으로 내정하고 전국 각지로 흩어진 대구 출신 스타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우용득 전 삼성 감독(당시 한일은행 코치)은 "1981년 10월쯤 서 감독이 전화를 걸어와 멋진 구단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그때 임신근 한일은행 감독도 똑같은 제안을 받았다. 실업팀 한일은행에 몸담았던 임 감독과 나는 실업야구 존속이냐, 프로 전향이냐를 두고 논의를 했고 내가 먼저 프로로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몇 달 뒤 원년 코치로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코칭스태프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고교야구를 주름잡던 대구 출신 선수들이 실업팀, 대학에서 맹활약 중이어서 후보군은 넘쳐났다. 더욱이 이들 선수는 대부분 서 감독의 제자들이었고 임 코치와 우 코치로서도 후배거나 함께 현역생활을 해온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면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업팀 롯데에서 은퇴한 지 1년 된 천보성을 선수 명단에 포함하며 창단멤버 구성은 마무리됐다. 당시 각 구단은 지역 출신 선수들을 뽑는 '순혈주의'에 따라 선수를 선발했다. 선수들은 특급(계약금 2천만원, 연봉 2천400만원)부터 F급(계약금 200만원, 연봉 600만원)까지 단계별로 차등을 뒀으나 삼성은 특급을 제외한 A~C급까지 3개 등급의 선수만 선발한다는 원칙으로 선수 사기에도 신경을 썼다.
원년 투수로 삼성 유니폼을 입은 박영진 상원고 감독(당시 성균관대 4년)은 고향 팀 삼성의 스카우트 제의에 고심을 거듭하다 프로 출범의 원년멤버라는 자부심에 예정된 실업팀 농협을 뒤로하고 사자 유니폼을 입었다. 박 감독은 "(성균관대) 3학년 때 농협에서 장학금 형식으로 급여를 받았고 4학년 때는 계약금 500만원을 받은 상태였다. 당시 농협 대리 임명장(지금은 과장급)을 받아놓은 상태여서 프로냐 평생직장이 보장된 실업팀이냐 진로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프로'라는 말이 가슴을 설레게 해 농협에 계약금을 반납하고 결국 고향 팀 삼성에 입단했다"고 말했다.
삼성은 장태수(현 삼성 수석코치)와 마지막 계약을 끝냈다. 서영무 감독, 임신근'우용득 코치, 투수 이선희 등 22명의 선수는 고교'대학'실업 무대를 주름잡았던 국가대표 출신의 스타들로, 삼성은 6개 구단 최고의 라인업을 완성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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