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박정희 이야기] (27)근대화의 상징인 경부고속도로 개통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970년 7월 7일,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도로야말로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전으로써 이루어진 공사요, 우리나라의 도로시대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라며 들뜬 목소리로 벅찬 감격을 토로하였다.

총연장 428㎞(현재는 직선화 등으로 416㎞), 305개(현재 353개)의 교량과 터널이 포함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당초 계획보다 1년이 앞당겨진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가 완공되었다.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샴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리며, "가장 싼 값(1㎞당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그는 1964년 12월, 서독의 아우토반(Autoban)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구상하였다. 그것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된 국토의 동맥을 되살리고, 경제 부흥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생각으로 손수 도로망을 그려가며 연구에 몰두하였다.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은 "밤늦게 청와대로 불려 들어가면, 고속도로 관련 서적이 쌓여 있는 서재로 데려가 직접 인터체인지 구상을 그려 보이곤 했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4월,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들고 나왔다. 아직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터라 야당을 중심으로 한 반대여론이 들끓었다. "부유층을 위한 유람도로를 만들려고 하느냐", "국가재정이 파탄 날 게 뻔하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런가 하면 육군의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하였고, 경부고속도로에 앞서 경인고속도로를 시험 건설했다. 1967년 3월 착공된 경인고속도로가 1968년 12월 개통되면서 국내 고속도로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서울 영등포∼인천 가좌동을 연결하는 총 연장 23.9㎞의 4차로였다.

1968년 2월 착공된 경부고속도로의 노선'공정 계획'추진 방식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결정했다. 당시 김정렴 상공부 장관은 "대통령이 마치 전쟁처럼 직접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회고했다. 건설 방식도 불도저식이었다. 1공구 공사를 하면서, 동시에 2'3공구를 설계해 나갔고, 인력이 없어 육사 출신 장교 22명이 2개월 간의 교육을 받고 현장 감독관으로 투입되기도 했다. 희생도 뒤따랐다. 최대의 난공사 구간이었던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에서는 낙반사고가 속출하였고, 2년 5개월 동안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토지를 헐값으로 매수하는 바람에 재산권 침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건설공사에 참여했던 기술진은 "막상 공사를 시작하니 모든 것이 부족했다. 장비는 물론 기술자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중장비는 대부분 6'25 전쟁 전후에 들여온 노후 장비였을 뿐 아니라 고장이 나기 일쑤였다. 공기 단축을 위해 잠을 잘 시간도 없이 하루 3교대로 바쁘게 일했다. 겨울에는 언 땅 위에 짚을 깔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르고, 트럭 꽁무니에 버너를 매달아 반복 운행을 하면서 땅을 녹인 다음 지반을 다졌다"며 눈물겨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970년대 경제 발전 초기단계에 건설된 경부고속도로의 의미는 참으로 크다. 그것은 우리 국토를 새롭게 구성하고, 우리 민족의 국운을 바꿔놓은 역사적 사업이었다. 또한 산업도로로서의 기능을 공유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63%, 국민총생산액의 63%, 공업생산액의 83%에 해당하는 경제 중추지역을 통과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 연계를 통해 경제 발전을 유도하는 것과 아울러 집결된 경제력을 1일 생활권으로 연결시켜 승수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그것은 물류비용과 운송시간을 감축함으로써 생산원가를 저하시킨다. 그와 함께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강화를 낳게 하고, 도시화 촉진'국토 이용의 효율성 증진'지역분화 가속화 같은 효과가 있다. 그런가 하면 국가적으로 볼 때, 주거와 산업의 절반 이상이 밀집된 노선으로 국가 산업과 경제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개발계획을 지원하는 산업도로의 기능, 국토의 남북을 관통함으로써 지역 간 교류를 확대시킬 수 있는 기간 도로망으로서의 기능, 그리고 지역 격차를 해소하는 한편 국민에게 편익을 제공하는 고속도로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 때 그 시절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어서 경부고속도로는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과도 같았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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