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설흔 지음/창비 펴냄)

정조의 '문체 탄압'에 휘둘린 두 선비의 굴곡된 삶

조선의 정조는 개혁적인 정치가로 알려져 있지만 문체반정을 주도해 글쓰기의 새로운 바람을 차단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억압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조선의 정조는 개혁적인 정치가로 알려져 있지만 문체반정을 주도해 글쓰기의 새로운 바람을 차단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억압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창비 청소년 도서상 대상작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글에 살고 글에 죽던 조선 후기 선비 이옥과 김려의 우정과 삶의 굴곡, 신념과 시대적 요구, 이상과 현실, 내면의 고통 등을 흥미롭게 그린 작품이다.

정조 임금은 고문(古文)이 아닌 소설류의 글을 혐오했다.

'시장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마디 하면 될 것을 '물고기를 팔려고 온 사람, 대나무 광주리를 인 사람, 술에 취한 사람, 먼데서 걸어온 사람, 말을 타고 온 사람, 땔나무를 지고 온 사람…' 이라는 따위의 요망한 글을 어째서 쓴다는 말이냐는 식이었다.

문체반정을 주도했던 임금은 성균관 유생의 글쓰기 습관을 물고 늘어졌다. 자신이 금지한 '소설 문체'를 쓰는 유생들을 유배 보내고, 군역을 부과하고,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다. 정조의 서슬에 관료들과 유생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당파가 분명했던 시절 상대의 꼬투리를 잡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세력들은 임금의 '문체문제'를 받들어 이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단했다. 대신들과 유생들은 임금의 눈밖에 날만한 문체를 숨겼고, 기왕에 써놓은 글은 불살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했다.

꼬장꼬장한 선비 이옥은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다. 그깟 문체가 무엇일까. 그깟 글이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문체를 고집함으로써 임금을 화나게 했고, 먹잇감을 노리는 대신들의 사냥감이 됐다.

선비 이옥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주도한 문체반정의 희생양이 되어 과거 응시를 금지당하고, 유배를 떠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글을 버리지 않는다. 하여 그는 평생 불우한 삶을 살게 된다. (이옥 자신의 기준이 아닌 사회 일반의 기준으로 볼 때.) 이옥의 벗이자 역시 뛰어난 글쟁이인 김려는 친구 이옥이 임금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는 것을 보고, 행여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봐 서둘러 불씨를 밟아 끈다. 더불어 가슴에 차고 넘치는 분방한 글을 써놓고도 그 글이 세상으로 나아가 활개칠까봐 책장 깊은 곳에 꽁꽁 숨긴다. 그러나 그 역시 임금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고, 결국 유배를 떠난다.

천신만고 끝에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김려는 이제 다시는 '임금의 눈' '세상의 눈'에 거슬리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실세인 친구를 찾아가 관직을 구걸한다. 신념을 버린 자라고 그를 탓할 수는 없다.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는 아이를 보는 일이 참으로 고통스럽네.'

관직을 얻기 위해 그가 친구에게 한 말이다.

이제 글 따위는 잊었다. 논산에서 현감자리를 얻어 유유자적 편안하게 살고 있는 김려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나 낯익은 문장을 읊어댄다. 남자는 바로 자신의 벗이자 조선최고의 문장가 이옥의 아들 우태였다. 우태를 통해 김려는 젊은 시절의 꿈, 이옥과의 우정, 문체 때문에 떠났던 유배생활, 거기서 만났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을 하나씩 떠올린다.

이 기억들을 통해서 김려는 자신이 얼마나 이옥의 글을 사랑했으며, 자신의 글을 사랑했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죽을 고생을 했던 유배생활 중에 만났던 사람들과의 계급과 성별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우정을 기억해낸다.

이옥의 아들 우태가 나타나 '괴이한 문장'을 읊어댈 때까지만 해도 숨기고 싶은 과거가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던 김려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사람과 사랑했던 것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외면해왔던 것들과 마주 선다.

이옥과 김려는 이 책의 두 주인공이다. 이옥의 아름다운 문장과 이상은 틀림없이 멋이 있다. 그는 천재이자 어떤 고통에도 굴하지 않는 기개 높은 선비였다. 그러나 김려, 그 역시 멋이 있다. 그는 따뜻한 밥과 안락한 잠자리, 처자식의 생계를 위해 신념을 버렸던 평범한 사람이다. 살기 위해 과거가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겨우 얻은 현감자리를 보배처럼 여기며 살았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부정했던 김려가 뜨거운 눈물과 함께 비범한 사람 '이옥'의 경지에 도달해가는 모습 또한 아름답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조선 후기 천재 문인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를 탁월한 상상력으로 펼쳐놓는다. 고전은 따분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불식시키는 동시에, 우리 조상들의 삶과 조선시대 후기의 선비문화를 아는데도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220쪽, 9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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