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창업주이자 총수인 이병철 회장의 출신지(경남 의령)보다 그룹의 '발상지(1938년 3월 1일 대구 서문시장 근처 중구 인교동에서 삼성상회를 설립)'를 우선해 대구를 연고지로 정했다. 1981년 12월 14일 6개 구단 중 가장 먼저 구단 명칭을 '라이온즈'로 확정, 발표한 삼성은 1982년 2월 3일 오후 5시 서울 신라호텔에서 이건희 구단주가 참석한 가운데 대대적인 창단식을 갖고 '프로'의 닻을 올렸다.
2월 17일 청색바탕에 황색사자가 아로새겨진 대형 구단기를 앞세우고 구단 임원'선수들이 새마을호 기차에서 내려 동대구역 대합실로 빠져나오자 1천여 명의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고향 팬'들에게 첫선을 보이는 선수단을 환영했다. 삼성은 대구시에 협조를 구해 두류공원 야구장을 전용 연습구장으로 정하고 쌀쌀한 기온 따윈 아랑곳없다는 듯 이마에 땀이 맺힐 만큼 힘찬 프로의 첫 동계훈련에 돌입했다. 공원은 들썩였다. '프로'의 이름을 단 선수들이나 경험하지 못한 '프로'의 세계를 미리 보려는 시민들의 설렘이 한겨울 두류공원을 뜨겁게 달군 것이었다. 박영진 상원고 감독(당시 투수)은 "고교야구의 추억을 간직한 열성팬들이 성인이 돼 다시 고향 이름을 내걸고 뛸 선수들을 연일 격려했다. 훈련 중간 음료수를 건네는가 하면 훈련이 끝났을 땐 종이와 펜을 들고 와 사인 요청을 하는 팬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코치진은 실업'아마 때처럼 3명(감독 포함)뿐이었고 선발-중간-마무리로 이어지는 마운드의 분업체계도 없었다. 각 팀이 1군에만 분야별 전문 코치를 10여 명 두고 세세한 부분까지 관리하는 지금과는 너무나 달랐다. 우용득 당시 코치(전 삼성 감독)는 "MBC청룡 백인천 감독은 선수로 뛰며 1982년 타율 0.412를 기록했고, 나 역시 14경기에 선수로 그라운드를 밟았다"며 "지금처럼 코치와 선수의 확실한 구분도 없었다. 코치는 팀 내 선임으로 온갖 일들을 도맡았다"고 했다.
훈련 역시 고교나 실업에서 하던 방식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팀 위주의 훈련이 주였고 분야별'개인별 훈련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실수를 할 땐 거침없이 욕이 날아왔고 단체 기합이나 손을 대는 일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반발하는 선수는 없었다.
경남타운에 방이 3, 4개 딸린 집 2채를 얻어 합숙 생활을 했지만 실업팀의 숙소개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가재도구는 없었고 한 방에 3, 4명씩 들어가 훈련에 지킨 피로를 풀었다. 그나마 삼성의 '군기'는 해태나 롯데 등에 비해 그다지 센 편은 아니었다. 다소간의 자율도 보장됐다. 30세 이상의 선수들은 함께 담배를 피울 수 있었고, 그 이하 선수는 선배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등 작은 불문율만 지키면 됐다. 당시 막내였던 오대석 포철공고 감독은 "선수 숙소는 1층에 있었는데 밤 11시쯤 되면 2층에서 기거하던 코치가 내려와 점호했다. 그때 일부 고참들은 사복을 입은 채 이불을 덮어쓰고 점호를 받았다. 코치가 나가면 섀시가 없는 창문을 넘어 달콤한 외출을 즐겼다"고 했다.
원정경기 때는 급 낮은 호텔이나 장급 여관에 머물렀다. 하지만 창단식을 마친 뒤 딱 하루는 최고급 호텔인 서울 신라호텔서 선수단이 묶었다. 박영진 상원고 감독은 "굉장히 유명한 호텔이라 호텔 곳곳에는 점잖게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곳에서 선수들이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다녔으니 눈총을 받을만 했다. 더는 그곳에서 묵을 수 없었고 서울 원정 때는 삼정호텔이 숙소가 됐다"고 말했다. 오대석 감독은 "호텔생활을 처음 해본 선수들이 그날 공짜인 줄 알고 방에 있는 냉장고 안의 음료수 등을 모두 비워 다음날 체크아웃 할 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며 그날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그래도 화려한 선수구성으로 우승후보 1순위로 꼽혔기에 삼성은 한국야구의 새장을 여는 프로야구 출범을 알리는 역사적인 개막전, MBC청룡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1982년 3월 27일, 3만여 명의 관중들이 들어찬 서울운동장야구장(동대문구장)서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프로야구는 막이 올랐고 삼성 이만수는 1회 초 상대투수 이길환으로부터 2루타를 뽑아 한국 프로야구 1호 안타 및 첫 타점의 주인공이 됨과 함께 5회에는 첫 홈런 기록까지 거머쥐었다. 삼성은 10회 말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 홈런을 내주며 30년째 리플레이 되는 화면 속의 쓰라린 추억을 갖게 됐지만 이날 펼친 명승부는 프로야구 열기에 불을 지른 확실한 촉매제였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알립니다=16일자 22면 '고향 품으로 돌아온 원년멤버' 기사(그래픽) 중 삼성 라이온즈 서영무 감독의 출신고는 '대구상고'이기에 바로잡습니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