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지난여름 때로 몰려온 우환을 겨우 치르고 삼재가 들었다는 말 한 마디에 뱀띠 부적 하나 똘똘 말아 끼운 단풍나무 목걸이 걸고 다니다 그만 잃어버렸는데요 다시 재앙의 복판에 선 듯 불안을 안고 살다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떠난 밀양 어딘가에 있다는 그 절, 나 참, 대단한 큰스님이 써준 것도 아니고 십이지신마다 수십 개 수백 개씩 복제되어 걸린 불교용품점에 그걸 구하러 간 것이 한심하다가 문득, '깊고 간절한 마음은 닿지 못하는 곳이 없다네' 벽에 붙은 한 구절에서 그만 붉어지는데요
눈발 뚫고 가는 그 길이 바로 부적 입디다요
권선희
"철학관을 나오는 여자의 뒷모습 같은 저녁이 온다"라는 문예창작반의 한 예비시인의 섬세한 글이 생각나네요. 철학관엘 간다는 건 말하자면 부적 같은 행위일 거예요. 또한 부적, 그거 세상이라는 재앙, 삶이라는 재앙, 원수 같은 관계라는 재앙들을 어떡하든 견디어 보려는 노력 아니겠어요?
가도 가도 세상은 벌판이더라, 먼지바람이는 사막이더라. 내 한 몸이 아니어서 멈출 수도 없는 이 운명을 어디 한번 의지하고자 손 내미는 부적. 시인의 밀도있는 문장을 따라가다가 나도 몰래 불교용품점까지 들어와 버렸네요. 부적을 쓴 사람이 아하, 큰 스님이 아니면 어떤가요, 동네 아저씨면 또 어떤가요.
화장실 안에 붙은 금언 하나에도 우리의 운명이 바뀌는 걸요. 우리를 울게 하는 건 결국 진정성 아닌가요. 사실 이 세상 험난해도, 가진 것 없어도, 진정성 하나 믿고 여기까지 온 걸요. 벽조목 없으면 어때요? 벽에 붙은 이 한 구절, "깊고 간절한 마음은 닿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이거야말로 영락없는 부적이네요.
(시인)
댓글 많은 뉴스
대통령실, 추미애 '대법원장 사퇴 요구'에 "원칙적 공감"
지방 공항 사업 곳곳서 난관…다시 드리운 '탈원전' 그림자까지
김진태 발언 통제한 李대통령…국힘 "내편 얘기만 듣는 오만·독선"
李대통령 지지율 54.5%…'정치 혼란'에 1.5%p 하락
"차문 닫다 운전석 총기 격발 정황"... 해병대 사망 사고 원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