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더 어둡기 전에

이 나라 정치판에 '보수'가 보이지 않는다. 한때 보수를 자처하던 이들이 스스로 보수를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부터 그랬다. 그는 보수층의 광범위한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취임사에서 이념을 넘어 중도실용으로 간다고 외칠 때부터 이 정부는 보수의 원칙도 도덕성도 사라졌다. 인사는 편협해 '고소영' 내각이라는 비난에 휩싸였고, 업적주의에 매몰돼 고환율 정책으로 재벌들 배만 불렸다. 강을 살린다면서 높은 보에다 자전거길을 만드는 건 좌파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다. 천안함 연평도를 연달아 당하면서도 안보 강화는 시늉뿐이고 뒤로는 남북정상회담에 매달렸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은 전(前) 정권이 박은 대못을 하나도 뽑지 못했다. 6'15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며, 세종시는 현재진행형이며, 빈부 격차는 오히려 커져 이념 갈등은 더 심해졌다.

손학규 의원은 한때 사랑받던 '신보수'였다. 그는 시장 자유를 외치는 그룹의 맨 앞에 서 있었다. 경기도 지사 시절 투자 유치를 위해 전 세계를 누볐다. '손학규와 찍새 딱새들'은 그걸 자랑한 책이었다. 그런 그가 민주당으로 건너가더니만 느닷없이 보편적 복지로 선회했다. 무상 급식으로 지방선거에서 망외의 성과를 얻는 걸 본 그는 당권을 쥐자 무상 의료 무상 보육에다 반값 등록금으로 넘어서 안 되는 다리를 건넜다. 서구 좌파의 고향인 영국에서조차 실패한 무상 의료 정책을 꺼내 든 걸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손학규는 좌파 본색을 드러낸 것일까? 아니면 그 역시 '포퓰리스트'였던 것인가? 덕분에 중도에서 오락가락하던 민주당은 민노당과 연대할 정도로 확실한 좌파 정당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정작 기회주의자들은 따로 있었다. 재보선에서 망해 버린 한나라당은 정신이 나갔다. 새 원내대표 황우여 의원은 당선 직후 왼쪽으로 급회전했다. 반값 등록금을 외쳐 좌파마저 경악하게 만들었다. 소장파들도 이대로는 안 된다면서 습관처럼 '쇄신'을 외쳤다. 사실을 말하자면 쇄신의 대상은 바로 그들이어야 했다. 한나라당을 웰빙 정당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그들 '책상물림'이었다. 그들은 들판에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은커녕 작은 비바람조차 견디지 못했다. 그저 대중이 가려워하는 곳을 적당히 긁어주면서 권력을 즐겼다. 이를테면 온실 안이 익숙해진 '해바라기'였다. 국가에 대한 어떤 비전도, 미래에 대한 어떤 고민도, 다음 세대에 대한 어떤 염려도 없었다. 있다면 다음 선거에서 탈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감뿐이었다. 그런 절박감은 '주이야박'(晝李夜朴)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낮에는 친이로 행세하다가 밤에는 미래권력인 박근혜 쪽으로 건너갔다.

그 박근혜는 이 나라 산업화를 이끈 박 대통령의 후광에 아직도 묻혀 있다. 그 어떤 '콘텐츠'도 내놓지 않았다. 아버지의 염원이었던 '복지국가'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포부 정도가 그녀가 보여준 정책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6'15선언 지지에서 한 발도 후퇴하지 않았고, 국민과의 약속을 앞세워 총리와 9부 2청을 대통령과 두 시간 거리에 두는 세종시 원안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명백히 보수 이념과는 거리를 둔 이런 행태에도 그녀에 대한 지지는 튼튼하다. 아니 그렇게들 믿고 있다. 영남의 집토끼, 보수의 집토끼가 어딜 가겠는가? 어차피 그들은 박정희의 후광만으로도, '한나라당은 우리 편'이라는 편 가르기만으로도 박근혜를 찍게 되어 있다. 거기에다 세종시 문제로 충청도까지 잡았다. 더군다나 충청도는 어머니인 육 여사 고향이 아닌가. 이런 믿음이 그녀 주변에 흘러넘친다.

여당의 새 원내대표는 그녀의 집 근처 호텔로 가서 수첩에 받아 적어온 대권 당권 분리 지침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했다. 그녀가 출국할 때 몇십 명의 의원들이 공항에 나타나 눈도장을 찍고 그녀가 참석하는 모임에선 경호원을 자처한다. 무슨 포럼이니 하는 것들엔 몇백 명의 교수와 법조인 언론인들이 줄을 섰다.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다. 대중들도 '박근혜 확신병'에 감염됐다. '세계 물 포럼'에 가서 '21세기는 블루 골드 시대가 될 것'이라며 물 관련 산업을 거론하자 관련 주식이 3배로 뛰었다. 네덜란드에 가서 농업을 강조하자 비료회사 주가가 폭등했다. 당사자인 박 의원은 이런 현상을 즐기는 것일까? 그녀는 동생과 올케에게 삼화저축은행과의 유착 의혹이 일자 '본인이 아니라고 했으면 끝난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한구 의원은 '가족을 건드리는 건 비열한 일'이라고 엄호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갔다. 이 나라 보수가 마음 둘 곳이 사라졌다. 표를 위해선 무슨 짓이든지 하고 권력을 위해선 언제든 이념을 넘는 그들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어둠이 오면 해 뜰 시간도 다가온다. 더 어둡기 전에 한마디를 해야겠다. '모든 권력은 허무하다. 그러니 제발 바라건대 당신들보다 백성을 더 생각하라.'

전원책(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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