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밤의 놀이터

나는 지금 밤이 깊은 놀이터 화단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다. 삐거덕거리는 그네 위로 반짝이는 무수한 잔별들,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 그늘 집 벤치는 쓸쓸하고, 스프링 달린 오리 두 마리도 노란 주둥이를 내민 채 앉아있다. 밤의 놀이터, 시각은 0시 20분, 대단지 아파트 안 도로로 차들이 오가고, 흰 트레이닝복을 입은 나는 운동화를 벗어 가로등 아래에서 탁탁 모래를 턴다.

오늘까지 엿새째, 나는 요즘 밤의 놀이터에서 혼자 달리기를 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 실크로드 탐사에서 체력의 한계를 느꼈던 터라, 이번 8월에 계획된 중앙아시아 탐사를 떠나기 전에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서다. 처음 5분 정도 달리면 숨이 차오르다가 10분 후쯤이면 뭔지 모를 기쁨이 땀과 함께 흘러내리는 모래밭 달리기에 흠뻑 빠져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달린다.

사실 가을 운동회가 무작정 싫을 정도로 나는 달리기에 '젬병'이었다. 당연히 한 번도 달리기에서 누구를 추월하여 이겨본 적도 없고, 도착 지점 선생님이 팔목에 찍어주는 도장은 받아본 적도 없다. 늘 참가상으로 받은 공책 한 권을 달랑 들고 사촌을 비롯한 온 집안사람들이 잔뜩 모여 앉은 운동장 한쪽의 돗자리로 가는 건 참 주눅 드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학년이던 한 살 위의 사촌 미란이가 계주 선수이기도 해서 여러 권의 공책과 연필을 신발주머니에 보란 듯 비죽이 넣어가지고 오면 나는 더더욱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운동회를 파할 때쯤 늘 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나타나 용돈을 나눠주시는 친척 아저씨가 상을 더 많이 받은 아이에게 자, 기분이다. 몇 푼을 더 집어줄 땐 참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나는 그래서 가을 운동회가 싫었다. 숨만 차고 갑갑해지는 달리기는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어떤 운동을 하십니까, 물어오는 이에게 난 늘 피식 웃으며 숨쉬기 운동만 합니다, 눙치고 만다. 그건 또 사실이기도 하다. 달리기를 비롯한 온갖 운동을 싫어하는 편치곤 음식만 조절하면 별다른 건강의 이상이 없고, 휴일에도 거의 빈둥빈둥 소일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렇게 밤의 놀이터에서 달린다. 역시 사람은 변해, 바람에 톡 연초록 나뭇잎이 떨어진다. 보는 눈이 없으니 스트레이트 훅! 권투선수처럼 몸을 흔들며 달리기도 한다. 이러다가 누구에게 말한 것처럼 내년 벚꽃길 마라톤의 하프 코스를 예약할지도 모르겠다.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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