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청와대 부뚜막의 소금

궁궐 창고에서 어느 고관 대신이 딸애한테 준다며 예쁜 바둑알 몇 개를 골라 들었다. 그러자 창고를 지키고 있던 김수평이란 말단 부하가 뒤따라 한 움큼 집어 들며 말했다. "저는 딸이 다섯이나 되거든요." 대신은 슬그머니 바둑알을 내려놓았다. 연산군 시절의 이야기다.

500여 년 전 그 시절처럼 온 나라가 윗물부터 썩었다고 질타한 대통령이 며칠 전 장'차관 70명을 불러 앉혀놓고 30분간 계속 호통과 질책을 쏟아냈다. 형식은 국정토론회 워크숍이었지만 '책상머리 훈계'였다. '목'금 연찬회를 업자나 아랫기관 뒷돈 받아 치르는 나쁜 관행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법무부 검사들도 그랬잖느냐.' '떠날 생각부터 하고서는 일 못 한다. 보따리는 퇴직 전날 싸면 된다.' '반값 등록금 얘기 나왔을 때 교과부장관은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하고 현실적인 대학 개혁 계기를 만들어 줬어야 했다.' '공직자 출신 공기업 CEO들은 네, 네, 하면서 적당히 시간만 보낸다.'…. 구구절절(句句節節) 옳은 말들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훈계를 듣다 보면 지금 일부 공직 사회 고위직들의 부패와 비리는 500년 전 궁궐의 바둑알 얘기를 넘어 1990년대에 유행했던 '민나 도로보 데스'(모두 다 도둑놈)란 풍자를 떠올리게 한다. 뭔가 더 잘하리라 믿었던 새 정권에서 고작 집권 4년차 만에 흐려진 윗물에다 제2의 '민나 도로보 데스'가 재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은 조목조목 어디가 병이 들고 어디가 곪아 있는지, 왜 그런 병이 들었는지를 제대로 짚었다. 그러나 진단은 그런대로 했지만 미리미리 부하들이 그런 병에 감염되지 않도록 '예방의학'을 펼치는 덴 실패했다. 이미 병세(病勢)는 말기에 가깝고 완치를 하기에는 남은 입원 날짜가 너무 짧다.

따져보면 좌우에 둘러 앉혀놓은 70명의 장'차관들은 몽땅 대통령 자신이 뽑아 앉힌 측근 부하들이고 입으로만 네, 네, 하며 복지부동만 한다는 수백 군데 공기업의 대다수 CEO들도 마찬가지다. (일부지만) 큰 감투 씌워 높은 회전의자 위에 앉혀줬는데도 주군(主君)을 속 터지게 하는 이유는 뭘까. 공직자든 조그만 회사의 월급쟁이든 임명권자가 아무런 학연도 인맥도 없는데 '너의 능력만을 믿는다'며 일자리를 맡겨주면 온몸으로 '충성'을 다하게 돼 있다.

반대로 혈족, 학맥, 선거 공신, 무슨 교회 같은 인연을 붙여 감투를 주면 '감지덕지'가 아닌 '당연한 전리품'으로 생각하게 된다. 선거 공신은 '내가 도와준 덕에 대통령 됐잖소'라고 목에 힘이 들어가고 대통령과 한교회 다닌 사람은 '그 정도 자리쯤이야 정리(情理)상 베풀어줄 만하지'라고 허리가 뒤로 젖혀진다. 이미 감투 값은 어느 정도 셈 쳤으니 굳이 일이나 충성심으로 따로 더 받들어야 할 의무감은 필요 없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조금만 충성을 바치고도 충분히 보답했다며 먼저 보따리 싸거나 출마 같은 딴 생각하기도 쉽다. 그게 보통 인간의 심성이다. 만약 MB가 취임 직후부터 선거캠프에서 왔다 갔다 한 정치바닥 사람들과 인수위에서 봉사한 교수들, 소망교회의 이런저런 신자들…. 다 옆으로 밀쳐놓고 '당신 일 잘하니 이 자리 맡아주시오'라고 울타리 바깥 인재들을 모았더라도 과연 이런 상황이 왔을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한 직후 전쟁에서 살아남아 '한자리할 수' 있었던 원로 가신(家臣) 미카와 무사들은 모두 다 시골고향으로 스스로 돌아갔다. 주군이 일 잘할 사람, 신세 진 것 없는 인재들을 더 많이 뽑을 수 있게 길을 터 준 것이다. MB 정권에선 그게 부족했었다. 태생적으로 오늘의 충복(忠僕) 부족을 잉태했고 자초한 것이다. 임금 혼자 아무리 똑똑해도 신하집단이 부패하면 속절없이 망한다. 반대로 연산군처럼 왕이 부패해도 (김수평 같은) 신하들의 혼이 살아있으면 끝장엔 중종반정 같은 개혁의 동력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는 늦었지만 입으로라도 야단쳐 보임으로써 국민의 뒤틀려진 심사를 다독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듯 아무리 질책이 지당하고 옳더라도 장'차관 책상머리 훈계가 우이독경으로 끝나면 민심은 귀를 닫는다.

청와대 소금도 마찬가지다. 입으로만 혼내는 백 번의 꾸지람보다 한 가지라도 똑 부러지는 부패 척결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국정과 부하 단속에 있어 립 서비스만으로는 당장 내년 선거 때 아무것도 못 얻는다. 아무리 키스를 많이 해도 아기는 못 낳듯이.

김정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