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구지법 김찬돈 수석부장판사는 기자에게 조만간 '향판'(鄕判)이라는 말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지난달 판'검사 등이 변호사 개업 시 퇴직 전 1년 동안 근무했던 곳의 사건을 1년간 수임할 수 없게 하는 변호사법 개정안(전관예우금지법)이 시행되면서 향판의 메리트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올 초 파문을 일으키고 법복을 벗은 광주지법 선재성 전 수석부장판사의 영향으로 향판이 전관예우를 부추기는 비리의 주범으로 인식됐기 때문일까?
물론 이런 영향도 없지는 않겠지만 김 수석부장판사의 해석은 사뭇 달랐다. 향판과 지역 경제를 대비시켜 한 해석이어서 눈길을 끌게 했었다. 향판은 말 그대로 특정 지역에서만 줄곧 근무하는 판사를 일컫는다. 법관 임용 시 서울지역에 배치받지 못하거나, 또는 본인이 지방 근무를 자원할 경우 향판으로 남게 된다. 수도권에서만 주로 근무하는 판사를 지칭하는 '경판'(京判)에 대응하는 말로, 요즘은 '지역 법관'이라는 말을 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십수 년 전만 해도 향판을 자원하는 지역 출신의 신임 법관은 넘쳐났다. 지역 법원에 근무하기 위해 줄을 서고 대기해야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일부는 대구에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경남지역 법원에 자원해 근무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젊은 법관들도 많았다고 했다. 실제로 대구에 근무하는 부장판사 이상 법관이 모두 30명인데, 이중 29명이 향판일 정도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공식이 깨지고 있단다. 김 수석부장판사는 "최근 5년 동안 대구에 임관한 5개 기수 '새내기 법관'들을 따져봤더니, 총 60명 중 4명만이 지역 출신이었다. 이 중 2명은 여성 판사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구가 요즘 참 살기가 힘들긴 힘들구나"라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한다고 했다. 대구는 대기업 하나 없는 유일한 광역시인데다 갈수록 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 나중에 변호사로 개업해 봐야 '밥벌이'라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젊은 법관들의 대구행을 막는다는 것이다. 또 향판은 지역에 둥지를 틀고 오래 근무하기 때문에 지역 경제에도 플러스 요인이 많다. 1, 2년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뜨내기 법관'과는 지역 경제에 미치는 효과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지역 젊은 변호사 '가뭄 현상'에서도 증명이 된다. 대구지방변호사협회에 따르면 대구에 등록된 변호사(전체 356명) 중 40세 이하는 54명(15%)에 불과하다. 대구변협 관계자들은 이 현상을 두고 서울과 수도권, 부산에 비해 경제 규모가 작고 기업이 적은 대구의 경우 사건 수요가 많지 않아 선임료가 전국에서 최하위 수준이어서 젊은 변호사들이 외면한다고 해석을 달았다. 또 지역에 연고지를 둔 젊은 변호사들조차 일감을 찾아 타지에서 개업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추세라고 했다.
어쩌다 향판마저 떠나는 대구가 됐을까? 요즘 젊은이들의 '탈(脫) 대구' 현상이 사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물론 대구의 젊은이들이 수도권 등지로 떠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를 손 놓고 지켜보고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나마 대구 인근의 중소도시에서 젊은이들이 찾아왔지만 지금은 그들도 대구를 더 이상 '지방의 기둥'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KTX 확대 등으로 요즘 '기회의 땅'으로 뜨고 있는 충청권이나 서울을 더 찾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향후 20~30년 후에는 경북의 중소도시 몰락은 물론 대구 등의 지방 대도시의 운명도 불을 보듯 뻔하다.
정욱진 사회1부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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