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동학을 포교하던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는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그릇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힌다는 좌도난정(左道亂正)이란 죄목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중이었다. 수운 선생이 과천에 머무는 동안 철종 임금이 갑자기 젊은 연세에 붕어하시자, 지레 겁먹은 조정 중신들에 의해 수운 선생은 대구 경상감영으로 다시 환송되었다. 1864년 1월 6일, 수운 선생이 대구로 환송되자 감사 서헌순이 그를 심문하였다. 감사는 수운 선생의 위엄 있는 용모와 번개 같은 광채가 번득이는 눈을 보고 금상의 갑작스런 붕어와 수운 선생의 대구 환송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닫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감사는 수운 선생을 죽일 마음이 싹 가셔 심복 이방을 불러 수운 선생의 회개를 유도하고 방면하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선화당을 나온 이방은 곧바로 수운 선생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갔다. 감옥 옆에 회화나무 한그루가 서 있어 옥 안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수운 선생, 그대는 양반의 자식으로 그릇된 도리로 무리를 모아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였으니 그 죄 죽어 마땅하나 조상의 공덕과 부친의 학덕을 참작하고 새 임금님의 등극이 있는 점을 감안하여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겠다고 약조한다면 방면을 건의하고자 한다."
이방이 수운 선생의 눈을 피해 입술을 바라보면서 일종의 조건부 방면을 제안했다.
"내 그대의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으나 죄가 없으니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소? 이 지경이 되기 전에 피신하라는 청을 받았으나 내가 일언지하에 거절했소. 도가 나로부터 나왔으니 내가 어찌 감히 피하겠소? 어찌 내가 몸을 피하여 그 화를 무고한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겠소? 또 내 스스로 헤아리니 시운이 이미 그러한 것 같소. 내 정리를 미리 다 하고 왔으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수운 선생은 창밖으로 보이는 회화나무를 바라보며 평온한 목소리로 흔들림 없이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이방은 수운 선생의 너무도 태연한 태도에 매우 분개하여 옥졸에게 곤장을 치라 명했다. 초장에 기를 팍 꺾어 놓으려는 속셈이었다. 이방의 명을 받은 옥졸이 곤장을 치자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나는 바람에 이방과 옥졸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옥졸의 바짓가랑이로 한 줄기 오줌이 흘러내렸다.
수운 선생의 이적(異蹟)에 이방은 더 이상 수작을 걸지 못하고 선화당으로 돌아와 감사에게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했다. 이방의 보고를 들은 감사는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쳐다봤다.
"계속 설득해 보도록 하라."
감사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이방에게 힘없이 말했다. 그 후, 이방은 틈만 나면 감옥으로 수운 선생을 찾아 회개할 것을 설득하곤 했다.
"수운 선생, 우리는 선의로 선생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비록 죄가 없더라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죄를 회개한다고 해주면 안 되겠소?"
"나는 무극대도(無極大道)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하니 그대는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생각대로 처분하시오."
이방은 감사의 지시에 따라 수운 선생을 설득하려고 무려 스물한 차례나 감옥을 들락거리며 심문하였으나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바위산과 같았다.
관원에 체포되기 전, 미리 시운을 알아차린 수운 선생에게서 동학 교주 자리를 물려받은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1827~1898) 선생도, 독자적으로 여러 선을 통해 그 스승의 방면을 시도하였다. 수운 선생이 경상감영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신도들이 십시일반 자발적으로 구원금을 모았다. 이 구원금은 수운 선생과 옥졸, 죄수들의 사식비로 주로 쓰였기 때문에 모두가 수운 선생과 동학 교도들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옥졸과 의형제까지 맺은 해월 선생은 옥졸의 옷을 갈아입고 직접 옥중으로 들어가 수운 선생을 독대하여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스승의 굳은 결심을 되돌릴 수 없었다. 관원이 당신을 체포하러 오는 날을 미리 알고 해월에게 일찌감치 교주를 물려주었으며, 특별한 일이 있다는 핑계로 그날 용담정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멀리 잠행하여 포교할 것을 명한 수운 선생인지라, 동학을 조정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스스로 감옥을 나서지 않을 것이란 점을 해월 선생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스승의 지시를 순순히 따르는 것 또한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옥문을 열어놓다시피 하고 옥졸이 자리를 비워도 수운 선생은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과 옥졸들마저 날이 갈수록 수운 선생에게 교화되어가자 감사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좌도난정지율(左道亂正之律)을 적용하여 수운 선생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감사의 효수형 명령이 떨어지자 수운 선생을 지켜보던 회화나무 잎사귀에서 수액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옥졸들도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다. 이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그 회화나무를 '최제우 나무'라고 불렀다. 이 나무는 지금도 대구종로초등학교 교내에 서서 그때의 장엄한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고 있다.
1864년 음력 3월 10일 오후 1시 30분경, 효수형을 집행하고자 옥졸들이 수운 선생을 모시고 옥문을 나섰다. 수운 선생은 마치 산책을 나온 듯 평온해 보였다. 두 달 남짓 생활해오며 감옥에 정이 들었음인지 뒤를 돌아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마당으로 나와 회화나무를 한 바퀴 돌고 나무 밑둥치를 슬쩍 쓰다듬어 주자 다시 잎사귀가 떨리며 끈끈한 수액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형장인 남문 밖 관덕당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관덕당은 대구읍성 남문 밖 아미산 아래에 있었다. 수운 선생의 이적이 과장되어 민간에 퍼진 관계로 새로운 이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여 그처럼 많은 인파가 모인 듯했다. 동학 교도인 듯한 사람들은 합장한 채 머리를 숙이고 용담가사를 부르기도 했다.
차돌이와 덕팔이도 수운 선생이 어떤 조화를 부릴지 궁금하여 남문 인근에 자리를 잡고 수운 선생의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덕팔아, 대신사께서 옥문을 열어주어도 나가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래? 그게 무슨 의미일까?"
"뱁새가 어찌 봉황의 마음을 알겠니."
"그렇지!"
"덕팔아, 대신사께서 오늘 큰 조화를 일으켜 천지개벽을 시키는 게 아닐까?"
"그럼, 우리도 다 죽는 거 아니야?"
차돌이의 말에 덕팔이는 약간 겁이 나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돌아, 정말 양반과 상놈이 없는, 그런 세상이 올까? 그런 세상에서 우리 곱분이랑 재미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꼭 그런 날이 올 거야. 대신사께선 당신이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노비 둘을, 하나는 며느리로 삼고, 다른 하나는 수양딸로 삼았대."
"헉!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다!"
"저기, 대신사께서 오신다."
수운 선생이 남문에 이르자 건장한 청년 두 명이 절절하게 바라보며 무언가를 갈구했다. 용담정과 감옥으로 여러 번 찾아왔던 차돌이의 간절한 호소가 마음으로 전해왔다.
"대신사님, 이 어지러운 세상과 이 불쌍한 백성은 어떡하라고 그냥 가십니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삼정이 문란하고 민생은 피폐한데, 양반 놈들은 자기들끼리 대가리 터지게 싸우고, 왜놈들은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믿었던 청나라마저 서양 오랑캐들에게 패퇴하여 북경까지 내준 마당에, 당신마저 이렇게 그냥 가버리시면 남은 어리석은 백성은 누구를 믿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입니까?"
차돌이 옆에서 분노에 가득 찬 슬픈 눈빛으로 수운 선생을 바라보는 청년, 덕팔이의 강력한 뇌파가 가슴을 찔렀다.
"도사님, 사람은 하늘이고, 하늘은 사람이라고 했다지요. 한울님은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있다고 하셨다지요. 양반과 상놈, 남자와 여자가 모두 똑같이 평등하다고 하셨다지요. 상놈도 열심히 노력하면 양반들처럼 인간답게 살수 있다면서요. 상놈도 사랑하는 정인을 양반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켜낼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이렇게 죽음의 길로 가시면 당신이 가르치신 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니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 한몸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곧 한울님 섬기듯이 하라. 한울님은 바로 네 마음속에 있다. 너희는 하늘이니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사람이다. 성실과 신의로써 밝은 세상을 만들고 어지러운 나라를 구하며 불쌍한 백성을 널리 구제하라. 도가 나로부터 나왔으니 내 스스로 당하리라. 내 스스로 헤아리니 시운이 이미 그러한지라 대운을 어김이 옳지 아니하다. 내 무극대도로써 천하를 건지고자 하니 너희들은 나의 길을 막지 마라. 내가 가는 길은 포덕천하(布德天下)요, 보국안민(輔國安民)이요, 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 나의 죽음이 너희들을 시천주(侍天主)로 인도하고 평온을 주리라."
차돌이와 덕팔이는 가슴으로 울려오는 수운 선생의 생생한 울림을 듣고 너무나 놀라 무릎을 꿇고 합장하였다. 수운 선생은 무심하게 아무 일도 없는 듯 남문을 빠져나와 관덕당으로 터벅터벅 끌려갔다.
수운 선생은 장대에서 내려온 밧줄에 머리카락을 동여맨 채 형틀에 엎드렸다. 목이 끊어지면 장대에 매달 참인 모양이었다. 망나니가 춤을 추는가 싶더니 목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망나니가 칼을 세게 내리치긴 했지만 수운 선생의 목은 멀쩡했다. 처음 올라온 망나니가 새파랗게 질려 내려가고 두 번째 올라온 망나니가 다시 목을 쳤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망나니가 다시 올라와 시도해 보았으나 수운 선생의 목은 멀쩡했다. 구경 나온 수많은 군중들이 웅성거렸다. 엎드려 있던 수운 선생이 일어나 형리에게 청수를 한 그릇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형리 한 명이 청수 한 그릇을 가져다 수운 선생에게 바쳤다. 수운 선생은 청수를 앞에 두고 주문을 외고 기도를 하고 나서 다시 형틀에 엎드렸다. 그제야 수운 선생의 생명이 끊어졌다. 그 순간 맑은 하늘에 비바람이 일며 일진광풍이 몰아쳤다. 형을 집행하던 형리와 망나니들이 혼비백산 도망갔다. 수운 선생의 얼굴은 편안하기 그지없었고 목의 상처는 곧 회복되어 말끔했으므로 효수한 머리를 장대에 내걸 수 없었다.
수운 선생의 순교와 동학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적극적인 포교로 동학은 조선의 사회개혁운동을 견인하는 중추적 사상이 되었다. 1894년 동학의 접주였던 전봉준은 갑오농민혁명을 주도하여 전주성까지 점령하며 그 기세를 떨쳤으나, 청과 일본 등 외세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혁명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갑오개혁이란 이름으로 부분적이나마 약간의 사회개혁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1907년 순종 조에 들어 수운 최제우 선생의 죄가 풀리고 천도교(동학의 후신)가 비로소 우리나라에 공인되었다. 천도교는 그 후에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선도하였는데, 1919년 3'1운동 때, 33인 중 손병희, 오세창을 비롯한 무려 15명이 천도교 인사로 구성된 점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성지, 관덕당이 대구 남산동에 있고, 교조 수운 최제우의 숨결이 서린 이른바 '최제우 나무'가 대구종로초등학교에 있다. 알고 보면 대구는 천도교와도 매우 인연이 깊은 도시이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나니. 대구를 아는 노력이 필요한 까닭이다. 대구의 옛 도심, 스토리로 다시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오철환 (소설가'대구광역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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