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은 됐지만 세간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서점에서 사라지는 책은 부지기수다. 잘 팔리지 않아도 아직 퇴출되지 않고 남아있는 경우도 있기는 한데 그래봐야 독자의 눈길을 받을 기회는 거의 없다. 책장 맨 아래 칸이나 구석 자리에 놓인 이 책들을 쓰다듬는 것은 기껏해야 아침저녁으로 먼지를 터는 점원들의 손길 뿐이다. 그런 책 중에 하나가 '기싱의 고백'(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수상록)이었다.
기싱은 100여년 전 불행하게 살다가 간 영국의 작가다. 생전에 그의 책은 잘 팔리지 않았다. 기싱은 반 지하방에서 눅눅한 '영국의 안개'를 이불처럼 덮고 잠을 청했으며,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영혼처럼 아끼던 책을 헐값에 팔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가난했고 불행했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은 어느 날 행운이 찾아왔다. 이제는 기억에도 희미한 한 지인이 그에게 연간 300파운드의 종신 연금을 남긴 것이다. 연간 300파운드, 요즘 우리 돈으로 치면, 글쎄…. 넉넉치는 않지만 검소하기만 하다면 꽤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정도였던 모양이다.
이 돈으로 헨리라이크로포트(책속 화자로 기싱의 분신으로 보면 된다)는 교외에 아담한 집을 구입하고, 나이 지긋한 가정부를 고용했다. 가정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사뿐사뿐 걸었다. 그릇 부딪히는 소리를 내지 않았고, 문 여닫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침마다 향 좋은 커피를 끓여냈고, 저녁에는 헨리가 램프를 켜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헨리는 비로소 종달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산책길에서 물푸레나무를 보았고 소년처럼 노래할 줄도 알았다. 그때까지 몰랐던 잡초에도 이름이 있음을 알았고, 땀흘리는 농부의 수고도 알았다. 고인(古人)의 시를 알았고, 고작 6펜스를 잃었다는 이유로 절망에 빠져 우는 아이를 달랠 줄도 알았다.
'사람들은 흔히 돈으로 가장 귀한 것을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상식적인 말은 곧 그가 돈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다.(중략) 나는 얼마나 많은 즐거움과 소박한 행복을 가난 때문에 상실해야 했던가!'
헨리의 이 고백은 작가 기싱이 돈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를 보여준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는 없지만, 돈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없지만, 돈 때문에 사랑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이다. 부자는 돈 덕분에 행복하지 않지만 가난한 자는 돈 때문에 얼마든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사람의 몸은 정직하다. 한 끼를 굶으면 몸에서 힘이 빠지고, 하루를 굶으면 몸을 가누기 힘들다. 사흘 굶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구걸이나 도둑질뿐이다. 사람은 아무리 고상해도 결국 동물이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보다 밥벌이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밥벌이에 감사해야 하며, 밥벌이를 성공적으로 해내는 자들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조지 기싱은 인간이 인간의 염치와 인격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배를 채우고 따뜻하게 입는 일이라고 말한다. 밥벌이가 인생 최대의, 절대의 화두가 된다는 것은 틀림없이 불행한 일이지만, 더이상 밥벌이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다. 440쪽.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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