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빨강이지?"
"응."
"사과는 빨강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인 거야."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데."
"사과를 그리려고 할 때 그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사과를 그릴 수 없다는 뜻이야."
한국 음악계 거장 이강숙 선생의 성장소설 '젊은 음악가의 초상'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과가 빨갛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좋은 사과를 그릴 수는 없다.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고쳐 배울 줄 알아야 그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강숙의 이 소설은 시골 소년이 음악을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음악교육가로 일선에서 뛰었던 현장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음악'에 대한 꿈은 낯설지도 이질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 철우(지은이 이강숙의 분신)에게 떨어진 명령은 일반과목 공부였다. 그에게 음악은 허락받을 수 없는 욕망이었다. 일찍 남편을 잃고 콩나물 장사를 하며 홀로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노래만 부르지 말고 공부도 좀 해야지. 1등 못하면 어쩌려고 그래."
"어머니, 노래만 안 합니다. 공부도 합니다."
"1등을 해야 나중에 판검사가 안 되나. 판검사 아니면 의사를 해야지. 판검사나 의사가 제일 좋다. 그래야 편하게 살 수 있다."
소년 철우는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싶었으나 판검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소설 '젊은 음악가의 초상'은 한평생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고 추구해온 한 남자가 깨달은 통찰과 지혜를 담고 있다. 전통적 가치에 굴복하지 않고, '최상의 나'를 발견하기 위해 분투해온 한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소설은 드라마틱한 전개를 추구하지 않는다. 원고지 20, 30매마다 소제목을 붙이고, 그 제목에 따라 일기처럼 전개된다. 작은 소년이 키 큰 어른이 되고, 꿈만 가졌던 아이가 현실에서 최고가 되기까지 맞닥뜨려야 했던 크고 작은 시련과 사건을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강력한 흡인력으로 풀어낸다.
소설은 한 인간의 성장사와 인생사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미국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 조교수, 서울대 음악대학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역임한 그가 어린 시절 뱉었던 남세스러운 말도 숨기지 않고 쓴다.
술집 아줌마가 철우에게 "뭘 드실래요?" 했을 때, 철우는 "술 주시고 아주머니 주세요"라고 답한다. 술집 아줌마는 술 달라는 말은 들었는데, "아줌마 주세요"라는 말은 못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안주는 무얼 줄까?"
"아줌마 주세요."
아줌마는 숫총각일게 분명한 철우를 이끌고 대폿집 옆에 붙어 있는 여인숙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소개하고 보니 '수성(獸性)으로 가득 찬 성장소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주체가 아니라 인생에 끼어들기 마련인 유혹에 해당한다.
"음악적 소리는 마음이 듣는 것이며, 음악에 감동되어야 음악을 잘할 수 있다. 실기는 수단일 뿐이며, 마음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훈련을 병행해야 한다."
지은이 이강숙이 서울대 교수시절부터 줄기차게 학생들에게 들려준 말이고, 또한 이 소설을 관통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처음 피아노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그 소리를 내는 악기의 이름조차 몰랐지만,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혔다. 그 소리에 이끌려 소년 이강숙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나비는 봄을 만났다. 248쪽, 1만2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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