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희망버스'와 '바보들의 전쟁'

수없이 보아온 장면을 또 본다. 노조의 강경파 몇 명이 수십m 고공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하면 공장 정문엔 회사 측 직원이 바리케이드를 친다. 뒤이어 전국에서 그러모은 제3의 외부 세력들이 밀려와 합세한다. 그 다음 출연 순서는 정치꾼들. 넥타이 맨 국회의원, 당대표 같은 사람들이 농성 현장에 몰려와 '격려'인지 '선동'인지 모를 쇼를 하고 TV에 얼굴 찍히고 나면 돌아간다. 그리고 막판, 안 봐도 될 손해를 수십억씩 본 뒤 경찰이 뛰어들고 나서야 '전쟁'은 끝이 난다.

바보들이 아니고서야 둘 다 손해만 보는 멍청한 싸움을 되풀이할 이유가 없는데도 판에 박은 듯 순서 하나 안 틀리는 '바보들의 전쟁'이 부산에서 또 벌어지고 있다. 7개월 넘게 싸우고 있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옛날 버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외부 세력의 원정 부대 이름이 '희망버스'로 바뀌었다는 것뿐 모든 게 그 순서 그대로다. '희망버스?' 이름 하나는 좋다. 분규를 끝내고 모두가 상생하는 희망을 향해 가자는 거라면 나쁠 것 없잖은가.

그런데 그 희망버스가 다녀간 뒤의 뒷자리를 보면 과연 희망을 싣고 온 버스인지 절망을 오염시키고 간 버스인지 헷갈린다. 부산시 영도구청장이 말했다. '희망버스는 그들에겐 희망인지 모르지만 극심한 교통체증, 심야 고성방가, 노상방뇨, 30t의 쓰레기로 피해를 입은 영도 주민들에겐 실망버스였습니다.' 부산시장도 '노사 합의가 됐으니 제3자 개입은 말라'고 했다. 동네 주민 자치위원장들은 '노상방뇨, 쓰레기 더미나 남기는 희망버스가 또 오면 이번엔 가만 안 있겠다'고 경고했다. 그런 가운데도 중진급 야당의원들은 너도나도 빠질세라 속속 농성 현장에 몰려갔다. 투쟁 현장에 얼굴 안 내면 왕따당할까 겁이 나선지 진정으로 근로자의 이익과 기업의 생존이 걱정돼서인지는 그들의 양심 속에 답이 있다.

손학규 씨 경우를 두고 보자. 그로서는 노동계의 표가 아쉽고 야당의 기반 세력인 민주노총의 눈치가 신경 쓰일 거란 건 이해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일 년 뒤 대선까지 꿈꾸는 정치인이고 야당의 지도자다. 노동자가 중요하면 기업인도 중요하고 노총 외부 세력이 소중하면 영도 주민도 소중하며 더더욱 준법이라는 공익 존중의 대원칙을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가 조선소에 가서 보인 행보(行步)를 보면 정치인의 분수를 넘었다. 큰 정치보다는 그때그때 부는 바람에 따라 고개를 휘돌리는 갈대의 모습이다.

그는 크레인에서 농성하는 여성에게 '회사에 정리해고를 철회해 달라고 전달했으니 건강 챙기라'고 '격려(?)'했다. 노사 협상 타결이 되고 다수 노조원이 파업을 철회한 지난달 27일 이후의 크레인 농성은 불법 시위다. 따라서 '건강 챙기라'는 건 격려가 아니라 '당신 혼자 공중에 스스로 갇혀서 계속 고생하며 법적으로 효력 없는 투쟁이나 하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여성의 지쳐가는 건강을 진심으로 마음 썼다면 '이미 노사 타결됐으니 내려와서 건강 챙기고 법 테두리 안에서 싸우라'고 해야 옳다. 불법임을 알면서도 투쟁을 선동하고 단돈 십 원 보탤 고용 능력도 없으면서 남의 회사 정리해고 철회를 큰소리치는 립 서비스 방문은 노동자의 고통과 생존 투쟁을 정치적 이벤트로 이용하는 짓이다.

조선소 기업 대표에게도 '7개월째 공장도 못 돌리고 고생 많았겠다. 앞으로 근로자 임금 더 올려도 될 만큼 공장 잘 돌아갈 수 있게 우리(정치)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느냐'고 했어야 했다. 그게 나라 경제를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근로자 이익을 챙겨내는 큰 정치인의 사고다. 그러나 그는 회사 대표에게 '강제 진압하면 제2의 용산 참사가 날 수 있다'고 협박 같은 말을 했다. 상생과 화합의 해법보다 힘의 해법을 내걸었다. 그런 정치인이 대권까지 쥔다면 수많은 나라의 분쟁들을 어떤 스타일로 해결할 것인지 앞이 내다보인다. 이번 영도조선소 농성은 법원도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법의 판결도 노사 협상 타결도 깡그리 무시하고 '건강 챙겨서 계속 크레인 안에서 싸워라'는 식으로 연약한 근로자에게 문제를 떠맡겨 놓고 떠난 야당 지도자, 기업엔 용산 참사를 거론하며 압박하는 정치. 그건 희망이 아닌 절망이다. 절망이 따로 있나. 매사 떼법으로 싸우는 투쟁 정치, 빈 입으로만 하는 선동 정치,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공짜 선심 정치로 있는 희망마저 휘젓고 딴죽 걸면 그게 절망이고 공멸이다. 그런 가짜 희망, 쓰레기나 남기는 희망버스, 바보들의 전쟁은 이제 그만 끝내야 한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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