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물러나기 무섭게 무더위가 뒤쫓아온다. 열대야로 밤잠을 설쳐야 하는 삼복더위가 온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여름이 얼마나 더웠으면 초복, 중복, 말복 이렇게 더위를 3등분했겠는가. 벌써 초복은 지나갔으니 어쨌든 첫더위는 넘긴 셈이다. 복(伏)의 의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에 나온 풀이가 재미있다.
육당은 복을 서기제복(暑氣制伏)의 줄인 말로 설명하고 있다. '서기'는 여름의 더운 기운을 뜻하고 '제복'은 복을 꺾는다는 뜻으로 복날은 더위를 꺾어 정복하는 날이라고 했다. 즉 더위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제압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맞서 극복하는 데 중요한 전법 중 하나가 흔히 말하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이다.
조선 선비의 더위 제압법은 '독서 삼매경'이었다. 더위를 잊음으로써 더위를 물리치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의관을 정제하고 책을 읽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다. 오죽했으면 삼복더위에 띠를 매고 앉아 있자니 미칠 것 같아 양반 입에서 큰 소리의 욕이 나오겠는가.
임진왜란의 명장 권율(權慄) 장군도 더위에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벼슬이 도원수(都元帥)인데도 한여름에는 관복 안에 속옷 저고리를 제대로 입지 않고 다녔다. 이 소문이 사위인 이항복(李恒福)의 귀에 들어갔다. '오성과 한음'의 오성 대감 이항복이 이를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하다. 어느 날, 오성은 어전회의 중에 긴급 제안을 한다. "전하, 날이 너무 더워 정신이 혼미하니 관복과 관모라도 좀 벗고 회의를 진행하도록 윤허해 주소서."
가장 더웠을 선조가 못 이긴 척 이를 윤허한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권율 장군만이 관복을 벗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용포까지 벗어 던진 선조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아니 어명을 거역하는가." 강력한 채근에 할 수 없이 관복을 벗은 권율 장군, 알몸에 가까운 그 모습이 어떠했겠는가.
이때 오성이 재치 있게 결정타를 날린다. "전하, 도원수께서 워낙 청빈하여 옷도 제대로 못 해 입고 다닌다 하오니 살펴주소서." 선조 마침내 파안대소하며 비단과 무명을 하사한다. 이후 권율은 아무리 찌는 삼복더위에도 의복을 다 갖춰 입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역시 유머와 해학은 더위를 날리는 훌륭한 명약이다.
윤주태(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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