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라면 다 됩니다. 책 한두 권을 맡기셔도 정성 들여 만들어 드리죠."
편집의 달인, 조판의 달인, 인쇄의 달인, 제본의 달인. 남산동에는 달인들이 모여 있다. 이 달인들 덕분에 골목에서는 손바닥보다 작은 명함에서부터 대형지도까지, 종이부터 플라스틱과 비닐까지 인쇄라면 안 되는 게 없다.
남문시장에서 계산오거리까지 1㎞가량의 '남산동 인쇄골목'은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최고 규모의 인쇄단지다. 600여 개의 인쇄 관련 업체가 모여 있고 오랫동안 인쇄업에 종사해온 상인들의 실력 덕에 연간 매출액은 1천억원에 달한다. 달인들의 골목인 만큼 가게마다 단골도 많고 재미난 사연들도 쏟아진다.
◆중앙로에서 남산동으로
1930년대 말부터 남산동 골목에는 인쇄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이 골목 근처는 대구에서 유명한 유흥가였고 인쇄업체들이 선호하는 입지는 남산동보다는 중앙로와 서성로, 봉산동 쪽이었다.
골목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부터다. 중앙로 인근 상권이 점점 커지고 땅값이 올라가면서 인쇄소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기 시작했고 기존 상권에서 멀지 않은 남산동이 낙점된 것이다. 1970년대부터 골목에서 인쇄소를 운영한 한 상인은 "처음 가게를 열 때만 해도 골목에 인쇄소가 5개밖에 없었다"며 "그러던 것이 70년대 말과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쇄소가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자 골목에는 1천여 개의 인쇄 관련업체가 들어섰다. 남산동 인쇄골목의 전성기였다. 빈 가게가 없어 새로운 업체가 들어오지 못했고 점포가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인쇄소가 생겨났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연달아 열리고 부동산 경기가 고공행진을 하면서 인쇄골목도 함께 들썩였다. 인쇄 주문이 물밀 듯이 쏟아져 골목에는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했다. 한 상인은 "당시 인쇄기는 지금보다 훨씬 느렸다"며 "그런데다 주문이 몰아치니 24시간 인쇄기를 돌려도 물량을 맞추지 못할 만큼 바빴다"고 말했다.
◆청와대도 알아주는 남산동 인쇄골목
골목은 인쇄의 역사와 함께 변해왔다. 1930년대 처음 인쇄소가 들어설 때는 활자 하나하나로 판을 짜서 인쇄를 하는 '활판인쇄'로 시작해 지금의 첨단 디지털 인쇄까지 현대 인쇄 역사의 축소판을 볼 수 있다.
16세 때부터 인쇄업에 종사했다는 박승현(60) 씨는 본인의 인쇄소에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30여 년 전 인쇄소를 시작하며 구입했던 활자인쇄기를 지금도 가게에 보관하고 있는 것. 5, 6년 전부터 부품이 제조되지 않아 기계는 멈췄다. 하지만 박 씨는 이따금 소량 주문이 들어오면 예전을 추억하며 먼지 쌓인 활자인쇄기를 돌린다. 박 씨는 "어릴 적부터 이 일만 해서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 업체들도 있다. 족보의 불모지였던 대구에서 4천 종 이상의 족보를 만들어내 전국적으로 이름난 '대보사'나 청와대의 달력과 연하장을 만드는 '경북봉투'프린팅'은 오랜 노하우와 실력을 무기로 전국을 상대하고 있다.
◆새로운 전성기 맞을 인쇄골목
상인들이 가진 골목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상당수의 인쇄소가 30~40년 전부터 장사를 시작해 아무것도 없었던 골목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낸 개척자이기 때문이다. 달서구 장기동 일원에 조성 중인 대구출판산업단지로 터전을 옮기려는 상인들이 거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79년부터 골목에 들어와 지금은 터줏대감이 된 이재화(63) 씨는 "옮기려는 업체가 600여 개 중에 5개 정도로 1%도 안 된다"며 "택시를 타도 인쇄골목 가자면 다 여기로 오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냐"고 말했다.
골목을 지키려는 상인들의 노력으로 골목에는 밝은 미래가 점쳐진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열렸던 '인쇄골목 축제'도 부활할 예정이다. 9월 14일 인쇄의 날을 기념해 만들었던 축제는 기간 동안 하루 수천 명의 방문객이 올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공연행사를 펼치고 인쇄소들을 개방해 시민들이 골목을 견학할 수도 있고 인쇄 체험기회도 마련해 지역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골목 경기가 나빠지면서 축제도 함께 멈춘 상태다. 남산동 인쇄골목 상가 번영회 박찬력 회장은 "오래된 골목의 노후한 분위기 때문에 최근에는 골목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며 "내년을 목표로 축제를 부활시킬 준비를 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우리 골목을 많이들 찾아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봄이기자 b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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