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어가 가장 어렸을 때는 모치라고 부르고/ 좀 더 자라면 참동어라고 부르고/ 그보다 더 자라면 홀떡백이라고 부른다./ 민어의 어렸을 적 다른 이름은 감부리/ 좀 더 자라면 통치라고 한다.(중략)/ 이제라도/ 누가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다오/ 전혀 다른 삶에 도전할 수 있도록/ 제발 나의 이름을 다르게 불러다오/ 숭어나 민어처럼." (김상현의 시 '민어나 숭어처럼')
여름, 바야흐로 민어 철이다. 민어는 여름 보양식으론 단연 으뜸이다. 옛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들이 최고로 꼽는 보신탕을 삼품, 바닷가 사람들이 선호하는 도미탕을 이품, 사대부들이 즐겨 먹었던 민어탕은 일품 자리에 올려놓았다.
민어는 귀족이다. 몸 전체에서 풍기는 미끈한 멋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가치를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저울질했듯이 민어도 그렇게 한번 따져보자. 몸집이 우람하여 듬직하고, 비린내가 나지 않는데다 가시가 적어 씹는 데 번거롭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고 맛이 있다. 이만하면 정일품의 자리가 아니라 주상의 보좌에 앉아도 꿀릴 것이 없다.
경상도 사람들은 민어를 잘 모른다. 동해에선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서해 임자도, 재원도 쪽에서 잡히는 민어는 주로 서울로 올라가고 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보낼 물량이 없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은 갈치 고등어 가자미 돔배기를 오랜 세월 동안 즐겨 먹었다. 경상도 사람이 생전에 민어 맛을 봤다면 택한 백성으로 축복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음식깨나 밝히고 다니는 도반들 중에도 민어를 맛본 적이 없는 이들을 위해 대구시내 도심의 목로집에서 민어파티를 연 적이 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나는 어릴 적 개떡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자랐지만 민어회를 먹으러 목포의 영란회집을 그동안 세 번이나 다녀왔다. 이 소식을 산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가 들었으면 벌떡 일어나셨다가 깜짝 놀라 다시 돌아가셨겠지만 이건 사실이다. 오로지 민어회를 목표로 목포에 간 것이 아니라 남도여행길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란 말대로 '간 김에 민어회나 맛보고 가자'는 제의에 '얼쑤' 하고 따라간 것뿐이다.
지난겨울 일생스쿠버 팀들이 4박 5일 여정으로 제주를 거쳐 추자도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마침 추자도는 5일 동안 비바람이 몰아쳐 횟집의 수족관은 텅 비어있었다. 도착한 날 저녁을 자장면으로 때우고 다음날 아침 "목포로 나가 민어회나 먹고 가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민어 이야기가 나오자 궁궐민박(064-742-3832) 안주인이 끼어들어 한마디 거든다. "우리 배도 민어와 돔을 잡으러 다니는데 대구 가서 민어 먹고 싶으면 연락해요." 민어의 목을 따 피를 빼내고 얼음을 채워 하루 정도 숙성시키면 횟감으로 일품이란다.
보름쯤 뒤 추자도에 전화를 했더니 "맞춤한 민어가 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다음날 1m가 넘는 민어 1마리가 택배로 도착했다. 목포에서는 민어회 한 접시가 4만5천원인데 단돈 10만원으로 열댓 접시를 썰고도 탕거리가 덤으로 떨어지는 횡재를 했으니 우리 팀은 당첨복권 한 장을 긁은 셈이다.
도반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칼을 갈고 모임 장소인 태화식당(053-257-6083'대구시 서야동)에 예약을 하는 등 북 치고 장구 치고 나 혼자서 부산을 떨어야 했다. 모두 10여 명이 모였다. 삶아 빤 수건으로 민어의 몸을 깨끗하게 닦아 낸 후 회를 뜨기 시작했다. 민어는 두툼하게 썰어야 제 맛이 난다. 도반들은 빨리 썰어 주지 않는다고 빈 젓가락을 입에 물고 아우성이다.
부레와 껍질은 살짝 데쳐 얼음물에 재빨리 담갔다가 끄집어내야 쫄깃쫄깃하다. 회 뜨고 남은 대가리와 뼈는 마늘만 넣고 그냥 백탕을 끓인다. 옛날 사대부 집에선 쇠고기와 무를 끓인 육수에 쌀뜨물을 좀 더 보충하여 미나리를 넣고 끓인 '민어감정'이란 탕국을 즐겼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그런 레시피를 알 까닭이 없다. 민어 1마리를 10명이 실컷 먹었는데도 회도 남았고 탕도 남았다.
소원이 있다면 올여름에는 재원도 바닷가 민박집 마당에 앉아 산란하러 올라온 민어들의 '꺽꺽' 하며 우는 소리를 들으며 향기로운 술 한 잔 마시고 싶다. 달이 뜨면 더욱 좋고.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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