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불이 켜진다. 그림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각도로 조정된 조명은 큐레이터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편안한 높이에 걸린 그림들. 전시장 벽에 걸린 그림은 큐레이터에게 자식과도 마찬가지다. 자, 이제 관람객들이 들어올 시간이다. 지난밤 밤샘 근무도, 중노동의 피로도 이 순간이 되면 다 잊힌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큐레이터는 '우아하고 지적이며 고상한 직업'의 대표격으로 종종 등장한다. 말끔한 고급 정장을 입은 큐레이터 역의 여배우는 높은 하이힐을 신고 갤러리를 오가며 그림 앞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이것은 큐레이터에 대한 1%의 진실에 불과하다.
"제가 처음 취직했던 1996년, 큐레이터는 미대생들에게조차 생소한 직업이었어요. 미디어에 비친 겉모습만을 보고 재미있겠다고 생각해 덥석 도전했어요. 지금요? 시트지 붙이고 각목, 유리 자르는 일까지 해내야 하는 일꾼이에요. 하하."
이미애 수성아트피아 전시팀장은 16년차 큐레이터다. 지역에선 고참 격이다.
이 팀장이 처음 큐레이터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420㎡(140여 평)의 전시장을 매일 아침 밀대질하는 것이었다. 손님이 오면 커피 타는 일은 물론이다. 나풀대는 드레스는커녕 아침부터 땀범벅이 되기 일쑤였다.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나 회의감이 밀려왔을 때였어요. 사람들이 '쟤는 몇 개월 버틸까' 수군대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죠. 그때부터 오기가 발동해 자발적으로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지만 모든 일을 똑같이 해냈다. 사다리를 타고 조명을 맞추고 그림을 걸었다.
첫 직장이었던 대백프라자갤러리에서 전시기획을 배우면서 자신의 한계에 부닥쳤다. '더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직장을 그만두고 박사학위 공부를 시작했다. 프리랜서 큐레이터 시절을 보내다가 2007년 수성아트피아가 개관하면서 개관 멤버로 들어왔다.
"작가는 그림만 내놓으면 돼요. 그 외에 홍보, 작품 거는 일, 조명까지 작품이 돋보이도록 하는 것은 모두 큐레이터의 몫이죠. 그런데 요즘은 작가들이 다 알아서 하는 경향이 있어요. 큐레이터의 몫인데도 말이지요."
수성아트피아는 1년 365일 전시장에 불이 꺼지는 날이 없다. 대형 기획전시만 해도 5, 6회 진행되며 대관 전시까지 포함해 1년에 50~60회 전시가 열린다. 하나의 전시를 완성시키기 위해 큐레이터의 준비기간은 의외로 길다.
대형 기획전시의 경우 2, 3년, 대관 전시도 한 달 전부터는 준비에 돌입해야 한다. 이 팀장은 하나의 전시에 몰입하면 그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한 전시를 준비하면 오로지 그 작품만 생각한다. 심지어 대화하면서, 자면서도 말이다.
"전시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다 보면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어요. 늘 메모해두고 아이디어 회의 때 서로 공유하죠." 늘 몇 가지 일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기 때문에 큐레이터 일은 의외로 스트레스가 많다는 게 이 팀장의 귀띔이다.
통상 전시 1, 2년 전부터 기획하고 6개월 전부터는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한다. 행정 절차나 서류의 양도 엄청나다. 서울에 있는 작가의 경우 수십 번 서울을 오가야 한다.
전시 직전에는 화실로 그림을 가지러 큐레이터가 직접 간다. 전시가 끝나고 작품을 안전하게 다시 돌려주는 것도 큐레이터의 몫이다. 현수막, 팸플릿 제작을 총괄하고 작품을 벽에 건다.
이 팀장은 돋보이는 전시를 위해 과감한 시도를 자주 한다. 온통 벽을 빨간색으로 칠하는가 하면 목공소에서 자재를 사 와서 톱질해 전시장 물품을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팀원들이 직접 발로 뛰면서 하기 때문에 예산이 적게 든다.
이렇듯 전시장 관련 하나에서 열까지 대부분 일이 큐레이터의 몫이다. 그렇다 보니 주말에도 출근한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이틀 연속 쉬면 오히려 몸이 아파올 정도로 일에 중독돼 살고 있다.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평생소원이 잠 한번 실컷 자보는 것이지요. 그래도 퇴근 후에는 컴퓨터 앞에 앉거나 책을 보지 말자고 제 나름의 원칙을 정해뒀어요. 주말에 출근하는 건 당연하고, 요일을 잊고 살아요."
지난해부터 엘보가 왔고, 오십견도 왔다. 몸을 아끼지 않는 큐레이터의 직업병인 셈이다. 지칠 때도 많고, 스트레스도 엄청나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전시는 설레고, 직업은 매력적이다. 준비에 어려웠던 전시일수록 감동한다.
"16년간 제 손을 거쳐 간 작가보다 앞으로 만날 작가가 더 많다고 생각하면 설레고, 늘 시간이 아깝습니다. 힘들지만 큐레이터는 매력적인 직업인걸요."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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